출판인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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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머리에 주먹질을 해대는’ 책을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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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1-07-20 00:00 조회1,78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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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머리에 주먹질을 해대는’ 책을 만들고 싶다






윤양미 | 산처럼 대표 xian23@korea.com



오래된 이야기다. 단행본 출판사에 입문하던 해의 일이니까 1994년도였던 것 같다. 까마득한 선배가 술자리에서 출판은 인신매매라고 단언한 것이다. 표현의 험악함도 거슬렸거니와 그런 수사적 은유가 무얼 말하고 싶은 건지도 의아했다. 그 선배의 말인즉슨 출판은 그저 사람장사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만큼 출판에서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답시고 뱉어놓은 말이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가졌던 거북살스러움이 세월이 흘러도 껄끄럽게 남아 있지만, 그 의미에 절감하는 바는 지금도 적지 않다.


이제 8종의 책으로 2003년을 마감한 풋내기 출판사에게 기획을 말하라 한다. 기획위원을 따로 모시거나, 학연으로 구축된 저자군이 형성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학위를 소유하여 나름의 학식이 쌓여 있는 것도 아니다. 대학 때의 전공을 살려 책들을 내고 있는 것 또한 아니며, 외국어에 하나라도 능통하여 외서 검토가 원활하지도 않다. 돌이켜보면 무슨 책을 내야 하나 희망사항으로만 가득했던 리스트를 적었다 지웠다 반복하며 하루하루를 초조히 보내던 창업 준비기가 내게 있었다. 그때 기획이라는 것이 감당하기 힘든 실체처럼 다가오기까지 했는데, 이런 원고 청탁을 받을 날이 있을 줄은 정녕 꿈도 꾸지 않았다.


나의 경우는 앞서 정의 내린 대로 사람의 중요성을 다시 확인하며, 역시 사람으로 이 기획이라는 문제를 대부분 풀어갔다. 일단 첫해에 발간된 산처럼의 책들 4종 가운데 3종 즉 『세계 지식인 지도』 『나무처럼 산처럼』 『신세기 랩소디』가 기획진행자나 저자들이 호의를 가지고 자발적으로 리스트를 채워준 격이었다.


2002년 1월에 출판사 등록을 마치자마자 첫 책으로 출간한 『세계 지식인 지도』도 평소 친분이 있었던 담당기자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20세기를 마감하고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기류로 감지되는 세계의 실천적 지식인들을 망라하여 짚어본 『세계 지식인 지도』는 2001년 한 해 동안 모 일간지에 목요일마다 전면으로 실려 눈독을 들인 출판사들이 몇몇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담당기자는 연재를 시작한 연초에 산처럼(그때는 출판사 이름도 없었다)에 의뢰했던 의리를 저버리지 않으며, 주위에서 다른 출판사를 소개하거나 권장하는 압력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신생 출판사의 첫 책으로 『세계 지식인 지도』가 출간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듣도 보도 못한 출판사가 이런 큰 기획거리를 가져갈 수 있었냐고 하며 산처럼이라는 출판사는 그 신문사 기자 출신이 독립하여 차린 데가 아니냐는 질문을 받곤 했다. 『세계 지식인 지도』가 일년 동안이나 신문에 별 탈 없이 연재되도록 내가 딱히 도운 일이 없는데, 계약서 한 장과 계약금 얼마로 원고를 달랑 들고 와 단행본으로 낼 수 있었던 데에는 그 이후의 책에서도 볼 수 있듯이 주위 사람들이 산처럼의 머리가 되고, 가슴이 되고, 손이 되어 움직여주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산처럼이라는 이름으로 책이 겨우 두 권 나온 즈음 세 번째 원고는 마감을 펑크내고 석 달 정도를 허송하고 있던 차에 인사도 드릴 겸 찾아뵌 이오덕 선생님께서 이 얘기 저 얘기 나누시다가 대뜸 책이나 한 권 내달라고 먼저 말씀을 꺼내 결국 선생님의 마지막 책이 되어버린 『나무처럼 산처럼』을 출간하게 된 것도, 『세계 지식인 지도』에 국제 사회주의 운동을 이끄는 트로츠키주의자 캘리니코스를 집필하신 정운영 선생님께서 2년마다 칼럼들을 묶어내는데 이번에는 산처럼에서 책을 내자고 하셔서 『신세기 랩소디』를 펴낸 것도 평소 친분에 바탕한 인간관계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참으로 소 뒷걸음질하다 개구리 잡은 격이어서 책이 출간된 배경을 밝히기가 일면 부끄럽다. 한데 말이 좋아 인간관계이지 그렇다면 출판사의 기획의도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산처럼이 기획에 대한 원칙과 소신 없이 명망 있는 저자나 학식 있는 주위 사람에게 의존하여 그들의 조언이나 원고에 의해 책들이 나오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출판사도 당연히 그렇겠지만 출간을 희망해서 원고를 보내오는 경우가 왕왕 있으나 종수를 늘려가는 데 제한이 있더라도 완곡히 거절하곤 한다.


원고를 책으로 출간하겠다는 결정을 내리는 것도 그 검토과정상 면밀히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지만, 거절하는 데에도 저자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이유를 조목조목 분명히 밝혀주어야 하기 때문에 어렵다. 산처럼에 구체화된 기획원칙이 가시화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평소의 생각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이 대강 잡히는 것 같다.



◎ 내 관심과 경험의 영역에서 사유의 출발점을 잡는다.


◎ ‘지금 여기’와 연결짓는 지점을 찾는다.


◎ 트렌드에 주목하지만 기성의 가치를 옹호하거나 강화하는 것은 피한다.


◎ 누가 왜 읽을 것인가를 재차 확인한다.


◎ 문장이 개성 있거나 진정성을 확보한 글쓰기여야 한다.


◎ 의미 있는 내용이거나 흥미롭게 접근해야 한다.


◎ 문(文)․사(史)․철(哲)을 아우르고자 한다.



산처럼은 현재 인문․사회학의 책들을 펴내는 것으로 출판의 방향을 잡고 있으며, 국내서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다. 따라서 원고를 청탁하거나 검토할 때 위의 조건들이 충족되는지를 살펴본 뒤 결정하여 산처럼이라는 이름으로 책들을 냈으며, 앞으로도 책을 펴내는 데 고민의 축으로 삼을 것 같다.



내 관심과 경험의 영역에서 사유의 출발점을 잡는다


내 경우는 인문․사회학 책들을 펴내는 출판사에서만 7년여 근무한 출판 현장에서의 경력이 저자라든가 기획에 대한 조언자들과 원활히 교류할 수 있는 조건으로 형성되어 있다. 그리하여 개인적인 관심과 경험의 영역은 역사를 중심으로 한 인문학 쪽에 기울어져 있으며 이 지점에서 어떤 책을 어떻게 낼 것인가 하는 고민을 시작한다.


그리고 관심이라는 것은 저자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주제에 대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역사학 중에 관심 있었던 저자 중에는 주경철 선생님이 있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출판사 창업을 준비하던 중 어느 날 인터넷을 하며 검색창에 저자 이름을 쳐보니 글들이 주루룩 뜨는 것이었다. 주경철 선생님은 두 군데의 인터넷 사이트에 연재를 하고 있었고, 이를 묶어보니 제법 단행본 한 권 분량이 되었다. 경쾌하고 재치 있는 글쓰기에 매료되어 있던 차라 단번에 전화로 저자의 허락을 받아내고 책으로 묶어낼 수 있었는데, 이가 바로 『테이레시아스의 역사』였다. 이 책은 인터넷에 실린 글들이라 매수가 짧고 주제도 다양하여 경쾌하고 다채로운 역사의 면모를 선사하지만, 한 주제로 한 권의 책을 집필해내는 요즘의 단행본 경향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책을 펴낸 뒤 독자들의 반응이 염려되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세계사를 주된 내용으로 한 역사 에세이는 몇 년 동안 출간된 적이 없었으므로 역사 대중서 시장에서 일정 정도 독자들의 관심을 끌 것이라고 기대되는 부분도 있었다. 그리고 교차된 우려와 기대를 그대로 반영하듯 초반에는 잔잔한 판매 곡선을 그리다가, 2002년 12월 「TV, 책을 말하다」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면서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경험의 영역이란 일상에서의 사소한 관심이나 불편 혹은 사건을 비롯해 저자나 역자와의 대화, TV 시청, 학술대회 참관 등 각자 처해진 상황에 따라 다양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역사학 답사가 기획으로 이어진 경우가 있었다. 2000년 여름 중국의 동북 삼성을 보름 정도 다녀왔는데, 장춘에서 남만주철도주식회사(약칭 만철)의 석조 건물을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다. 만철의 경우, 한국에서는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식민지조선을 지배한 싱크탱크로서의 거부감만 있었지 제대로 소개된 바가 없었다. 시간을 두고 검토해 보니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정책이 핵심적으로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일본 현 기업들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 거기다 박정희 정권 때 미니스커트나 장발들을 규제했던 풍속에 대한 단속 등이 만철의 정책에서 나온 것이라는 흥미로운 사실도 알았다. 곧 출간할 예정인 『만철』은 그때 답사를 떠나지 않았다면 번역해야겠다는 결심이 쉽지 않았을 책이다.



‘지금 여기’와 연결짓는 지점을 찾는다


어떤 주제가 되었든 현재적 관점에서 그 의미를 접목시키고자 한다. 그것이 전공서이든 대중서이든 그래야 그 책의 의미가 살아난다고 본다. 산처럼에서는 한국 철도에 대한 책 『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을 지난 2003년 4월에 펴낸 바 있다. 철도가 근대의 형성에 중추적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지금 그런 철도가 우리에게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를 기본 전제로 깔고 천착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출판사의 입장이었다. 이 책은 철의 실크로드 중에 동의선 연결이 기사화되는 시점이기도 했고, 국내 최초로 한국 철도를 문화사적으로 접근한 저술이기도 하는 등 여러 측면에서 적극적인 신문 서평을 받았지만, 식민지 시대 수탈의 상징이었던 철도가 지금 여기에서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살펴보고자 한 것이 주된 기획 의도였다.


그 외의 『네덜란드― 튤립의 땅, 모든 자유가 당당한 나라』도 강대국 중심의 역사 편향에서 벗어나 작지만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행복하게 사는 국가를 들여다보고자 한 것이 기획의 의도였다. 우리나라가 반도의 작은 나라인데도 미국, 중국, 일본 등의 강대국 몇 나라만을 주목하는 것 같아 사고와 관심의 폭 넓히기 차원에서도 네덜란드라는 나라를 소개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던 것인데, 월드컵이 있었던 그 전해에 한번 휩쓸고 지나간 히딩크의 후광을 노린 한 발 뒤늦은 책 같이 되어버렸다.



트렌드에 주목하지만 기성의 가치를 옹호하거나 강화하는 것은 피한다


기획자라면 모름지기 사회정치적 이슈, 새로운 생활 스타일, 화젯거리, 학계의 경향이나 신간 목록 등은 챙길 것이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의 학계, 문화계, 사회계의 수준은 어느 정도이며 문제는 무엇인지를 가늠해 볼 터인데, 그 지점을 토대로 하여 사안마다 새로운 접근이 시도되어야 한다고 본다. 역사나 사회, 문화 등도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늘 새롭게 변화, 발전하고 있으며, 그 해석 역시 새로워야 하기 때문에 새로운 사고, 새로운 발언, 새로운 저자에 주목해 인식의 지평을 넓혀가는 데 책이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본다. 우리 삶과 문화와 사회와 국가와 역사에 편재된 모순들을 지적하고 새로운 측면에서 접근하여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가운데 학문과 사상의 발전이 있고 우리 삶의 질도 향상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누가 왜 읽을 것인가를 재차 확인한다


너무 기본적인 사항을 불필요하게 반복하는 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 왜 읽을 것인가를 잘못 짚어서 기획이나 편집의 방향을 뒤늦게 다시 원점에서부터 설정하기도 하고 독자층의 관심을 뒤늦게 받기도 한다.


1차 독자층을 잘못 판단해 판매에 영향을 미친 경우가 있었다. 『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을 펴내면서였는데, 책 출간 이후 보도가 적잖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판매가 부진했다. 인문학에 관심 있는 30, 40대가 주된 독자층일 것이라고 상정했던 것인데, 그보다는 주위의 강사나 교수들이 지적했듯이 이 책은 대학교 ‘교재용’이었다. 교재라면 늦어도 4월 이전에 출간됐어야 했는데 학기말 시험이 끝난 시점에 출간되어 책을 주되게 소화할 독자들을 일차적으로 놓쳤던 것이다.



문장이 개성 있거나 진정성을 확보한 글쓰기여야 한다


원고를 검토하거나 의뢰할 때 저자의 문장을 중요한 판단의 잣대로 삼는다. 물론 바르고 개성 있는 문장인가를 본다. 개인적인 독서 취향은 미문(美文)에 끌리는 편이지만 우리말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살려서 쓴 『나무처럼 산처럼』처럼 진정성으로 울림을 주는 글도 높게 평가한다. 몇몇 사람들은 『나무처럼 산처럼』이 문장이 빼어나지는 않다고들 하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저자이기도 한 이오덕 선생님의 삶의 올곧음과 푸근한 정서가 그대로 배어 있어 잔잔한 감동으로 우리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글의 힘이 느껴지는 책이 『나무처럼 산처럼』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들쳐보면 지금은 돌아가셨다는 사실에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부터 맺혀오지만 깨끗한 우리말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던 선생님의 모습이 오롯이 되살아난다.


그럼에도 문학적 수사가 빼어난 글쓰기를 해서 오랫동안 주목해왔던 저자로 박천홍 씨가 있다. 박천홍 씨는 <출판저널> 기자로서 출판 관련 기사나 서평을 써왔는데, 내용에 대한 학문성만 확보된다면 섬세하고 치밀하며 뛰어난 문장력으로 저자로서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다고 본 것도 사실 문장력에 대한 판단이 우선이었다. 박천홍 씨는 책을 내본 적이 없었으나 철도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몇 차례의 고사에도 불구하고 설득을 거듭해 원고를 청탁하였는데, 『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이라는 기대 이상의 좋은 원고를 출판사에 넘겨주었다. 문장에 대한 기본기 없이 좋은 글을 쓰는 저자가 많지 않은 현실을 고려해 볼 때 저자의 글쓰기에 대한 기획자로서의 안목과 판단을 소홀히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의미 있는 내용이거나 흥미롭게 접근해야 한다


마땅히 소개되어야 할 주제나 내용인데,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차원에서 출간을 결정할 때도 있다.


『가네코 후미코』의 경우, 주위에서 몇 분들이 훌륭한 책을 출간했다고 손을 덥석 잡으며 격려해준 책이지만 판매 수치는 우울하기만 했다. 가네코 후미코는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관심 속에서 당연히 시선을 잡아끈 인물이었다.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박열․가네코 후미코 천황폭살사건’은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뒤흔든 대대적인 사건이었는데 지금은 까맣게 잊혀져 있었다. 박열의 첫째 부인이 일본 여자였다는 것 정도를 알면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조선 독립에 피식민지인인 박열과 뜻을 같이하여 사상 투쟁을 벌이고 죽음으로 전향을 거부한 가네코 후미코의 삶은 한편의 비극적 드라마였다. 한일관계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가 늘 현안으로 대두해 있는 상황에서 가네코 후미코의 존재가 던져주는 역사적 시사점이 있기에 이 책은 중요하다. 그렇다고 잊혀진 인물의 역사적 의미만을 염두에 두고 새롭게 부각시키고자 한 것만은 아니다. 역사학자가 평전을 쓸 때 실증적인 접근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보여준 좋은 평전이었기에 번역 출간한 점도 있다.


그리고 독서를 하면서 즐거움이란 요소도 무척 중요시하기에, 내가 재미있는가 하는 점을 원고검토에서도 고려하는 편이다. 원고검토 중에 재미있었던 원고로는 단연 『테이레시아스의 역사』가 있다. 재미뿐 아니라 상식의 허를 찌르는 유익하기도 한 책이지만.



문․사․철을 아우르고자 한다


문․사․철을 아우른 원고를 쓴다는 것은, 그리고 기획자의 입장에서 그런 원고를 만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주제를 정해 원고를 청탁하거나 검토할 때 문학과 역사와 철학을 두루 섭렵해 있을 것을 요구하거나 희망한다.


산처럼의 책 중에서는 『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이 소설이나 시 등의 문학적인 자료를 인용하여 당시의 상황을 생생히 추적해냈으며, 근대라는 역사성을 조명하였고, 근대 문명사회의 도래에 따른 위험성을 드러내어 사회학적으로 접근하기도 했고, 철도의 등장으로 인해 한국이 규율 사회로 변화하는 모습을 푸코의 시선으로 잡아냈다.


그리고 굳이 문․사․철이 아니더라도 학제간의 공동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는 요즘 미술과 의학, 과학과 사회, 영화와 철학 등 통합된 학문의 결과물들이 출간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더욱 활성화될 여지가 있는 것이다.


이상 산처럼이 기획에서 고려하는 사항들을 정리하고 거칠게나마 부연 설명해 보았다. 그 외에 기획을 말하면서 가장 경계하는 것 중의 하나는 이런저런 주제나 소재를 떠올리며 이래서 저래서 책의 꼴이 되지 않겠냐는 식의 태도다. 책이란 것이 텍스트로서의 완결성도 갖추어야 하지만 그만큼의 비중으로 중요한 것이 콘텍스트로서의 의미 확보라고 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어느 관심사인들 책이라는 그릇에 담을 수 없단 말인가. 한 시대의 사회문화적 결정체로서 한 권의 책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지금 여기에서의 연결지점을 그래서 중요하게 여긴다. 하여 내가 생각하는 책이란, 그리고 책을 펴내는 행위란 ‘사회와의 호흡’ 같은 것이기도 하다.


21세기라는 문명사적 대전환의 시기를 맞아 생활도 급변하고 각 분야에서도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책이 갖는 생명력과 영향력, 그리고 존재 의미에 대해 위태롭다고 진단하는 목소리도 높다. 책은 상상력의 원천으로 그 역할이 일정 정도 확보되어 있기도 하지만 영상매체의 부상이나 디지털 시대의 등장으로 인한 매체적 영향력의 위축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데에 대해 대안적 사고를 필요로 하는 시기인 것 같다. 내용이나 책 형태에 대한 새로운 시도, 독자층에 대한 신선한 접근 등 이제는 항시적이기까지 한 책문화에 대한 위기를 견뎌내거나 극복할 만한 지혜는 다층적․다면적이어야 할 것 같다.


그럼에도 심정적이나마 책을 위협하는 것들이 아무리 지레처럼 깔려 있는 문명의 가속도 시대를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오래도록 친숙했던 종이책이 선사한 고전적인 독서의 즐거움이 사라지거나 버림받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본다. 소박하게나마 진단해보면, 최소한 습관이나 문화가 가진 관성의 힘 때문에라도 그렇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지금 컴퓨터에 더 익숙하다는 자라나는 세대에게는 학교교육에서 독서를 생활화하는 것이 어느 정도 성공한다면 이 역시 비관적이기만 한 것은 아닐 것이라고 섣부른 짐작을 해본다. 아직도 가뿐히 한 손에 쥐어지는 한 권의 책으로 단조로운 일상에서 방만한 자세로도 감각과 의식의 무한 확장을 우리는 체험할 수 있지 않은가.


산처럼은 이제 막 발을 뗀 출판사다. 아무리 생각해도 갈 길이 멀다. 잘 할 수 있을까, 자못 긴장되는 순간들이 엄습하곤 한다. 아나키스트 김원봉에게 스승 황상규(일설에는 확실하지 않다고도 한다)가 “산과 같이 되라”라는 의미로 지어준 호가 약산(若山)이며, 이를 한글로 풀어서 지은 출판사 이름이 산처럼이다. 한참 못 미칠지언정 그 정신과 열정과 기개로 책 만드는 자세를 생각하곤 한다.


실현 가능한지의 여부를 결과로 추궁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독자들에게 산처럼이 대체 어떤 의미로 다가가기를 원하며 책을 만드느냐 물어와 허심하게 대답하라 하면, 카프카가 했다는 “우리 머리에 주먹질을 해대는 책이 아니라면, 우리가 왜 그런 책을 읽어야 한단 말인가”라는 말 대신에 감히 이렇게 외치고 싶은 것이다.


“우리 머리에 주먹질을 해대는 책이 아니라면, 우리가 왜 그런 책을 만들어야 한단 말인가!”





* <기획회의>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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