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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조선의 위대한 그림, 왜 일본의 문화재가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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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3-12-01 00:00 조회1,35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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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신 서울교육대학교 강사



1447(정묘)년 어느날, 안평대군의 자택인 비해당(匪懈堂)에는 세종조 최고의 문사들이 초청되었다. 인왕산 수성동 계곡에 자리 잡은 비해당은 세종조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의 향기가 응축된 조선 최고의 풍류 공간이었다. 성삼문, 이개, 박팽년, 신숙주, 서거정, 이적, 박연, 김종서 등등 이름 높은 선비들이 그날 이 공간에 초대된 이유는 안평대군의 기이한 꿈을 그린 그림인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를 감상하고 찬문을 짓기 위함이었다. 유가에서는 꿈을 해몽하는 것을 즐기지 않았으나, 안평대군의 꿈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안평대군은 어느 날 꿈속에서 무릉도원을 거닐었고, 이는 1000년 전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 즉 난세를 떠나 은거하는 선비의 이상향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마치 안평대군 자신의 운명에 대한 계시와도 같이 느껴졌다. 안평대군은 이 놀라운 꿈을 꾼 후 먼저 세종에게 내용을 고하였고, 부왕의 허락을 받아 당대 최고의 화가인 안견에게 그림을 의뢰하였다. 그는 이 꿈을 그림과 글로 남겨, 당대, 그리고 후대에까지 자신의 충절을 알리고자 한 것이다.



▲ 안견의 1447년 그림 <몽유도원도> ⓒ덴리대학교 소장, 출처 Wikimedia Commons)



안견의 그림은 3일 만에 완성되었다. 이는 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짙은 안개에 뒤덮인 봄날의 도원을 그리고 있었다. 도연명의 ´도화원기´와는 다른, 안평대군 꿈속의 무릉도원의 모습이었다. <몽유도원도>에 안평대군은 그의 꿈과 이에 대한 자신의 해몽을 담은 글인 ´몽유도원기(夢遊桃源記)´를 붙여 넣었다.



"사방에는 산이 바람벽같이 치솟고 구름과 안개가 자욱한데, 멀리 또 가까이 복숭아 나무에 햇빛이 비쳐 어른어른 노을과 같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거기에는 또 대나무 숲에 띠풀을 덮은 집들도 있었다. 싸리문은 반쯤 열려 있고 흙담은 이미 무너져 있었다. 닭과 개와 소와 말은 없지만, 앞 시내에는 조각배 하나가 물결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어 그 정경이 소슬한 것이 신선이 사는 곳인 듯 하였다."(안평대군, ´몽유도원기´ 중)



비해당의 대청에 안평대군의 몽유도원을 기록한 안견의 그림과 안평대군 자신의 글이 걸렸고, 색색의 종이가 문사들에게 나누어졌다. 문사들은 저마다 그림 속에 묘사된 기묘한 도원의 풍경과 여기에 깃든 안평대군의 큰 뜻에 감동하였고, 이에 찬양하는 시를 지었다.



"잠깐 사이에 꾼 꿈이라 하지만

꿈 속에서 겪은 일 낱낱이 현실이라네"

-신숙주



"지체 높고 맑은 생각 고상하신 분, 도가 절로 트여

초연히 세상 밖의 신선 사는 곳을 꿈꾸셨네"

-이개




안평대군의 큰 뜻이란, 다름 아닌 세속의 정치를 떠나 은거하여 왕위의 순조로운 장자 승계를 돕겠다는 충의의 표현이었다. 조선에서 장자 승계는 세종조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실현되지 못했고, 병약한 왕세자와 영민한 대군들 -수양과 안평-등의 존재는 세종의 근심거리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 붙인 문사들의 찬문들, 즉 <몽유도원도>의 시권은 결국 세종의 뜻에 따르겠다는 충의를 표현한, 하나의 연판장이 되었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듯, 위에 모인 문사들은 계유정난 이후 상반된 운명의 길을 걷게 된다. 일부는 충의를 다해 죽음의 길을 걷고, 일부는 배신을 하여 영화로운 삶을 누릴 것이다. 현실정치를 떠나 은거하고자 했던 안평대군 또한 역적으로 몰려 사사되었고, 1만권의 장서와 고금의 희귀한 그림들, 당대 최고의 정원예술로 유명했던 비해당 역시 파괴되었다. 안평대군과 대신들의 충절이 담긴 <몽유도원도> 시권은 정난과 함께 홀연히 그 모습을 감추었다가 1928~29년 무렵 일본의 고미술상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었으며 아직도 일본의 국보로서 덴리대학교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계유정난은 조선의 조정과 왕실의 비극일 뿐 아니라 세종조에 꽃 피었던 조선조의 찬란한 문화의 비극이기도 했던 것이다.



▲ <사라진 몽유도원도를 찾아서>(김경임 지음, 산처럼 펴냄). ⓒ산처럼

조선 시대의 회화 걸작인 <몽유도원도>에 얽힌 위 이야기는 <사라진 몽유도원도를 찾아서> (김경임 지음, 산처럼 펴냄)에 서술되어 있는 내용을 재구성한 것이다. 외교관 출신이며 유네스코에서 근무하면서 약탈된 문화재에 관심을 가져온 저자는 조선시대의 회화 걸작 <몽유도원도>의 운명과 역사적, 문화사적 의미를 찾기 위해 다양한 역사적 자료를 조사하여 수백 년에 걸친 한 예술작품과 그와 관련된 다양한 문화적 배경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나의 큰 줄기로 그려내었다.



<몽유도원도>는 조선 3대 화가로 일컬어지는 안견의 작품이며, 현재 남아 있는 세종조의 거의 유일한 회화 작품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작품의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역사적, 문화사적 의미는 그동안 일반 대중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계유정난 때 자취를 감추어 1900년대에야 일본에서 나타났고, 덴리대학교에 소장되어 있으며 그리고 지금은 한국의 국보가 아니라 1987점에 달하는 일본의 회화부문 중요 문화재의 하나라는 사실은 아마도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잘 알지 못하는 사실일 것이다.



또한 이 그림이 당대의 역사적인 드라마의 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으며, 안평대군의 발문 ´도원기´와 김종서와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 당대의 역사적 인물들의 친필 찬문으로 완성되는 화권이라는 사실도, 무엇보다 이 작품의 주제인 ´안평대군이 무릉도원을 거닐었다´라는 꿈이 지닌 역사적 의미도 대중적으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었다.



물론, 미술사 연구자가 아닌 일반 대중들이 조선조의 미술작품에 대해 상세히 잘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배경이 된 계유정난이 드라마와 영화 등 다양한 예술작품의 소재로 쓰일 만큼 대중적인 역사적 사건이며, 찬문을 남긴 인사들 또한 조선 초기의 주요 인물-충신 혹은 배덕자들로서 널리 알려진 것을 감안하면, 사건의 등장인물이 한꺼번에 등장하고 계유정난의 중심에 있는 귀중한 사료인 <몽유도원도>에 얽힌 이야기가 대중적으로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은 신기하기까지 하다.



회화 작품을 감상함에 있어서 작품 내부의 형식이나 회화사적 맥락, 그리고 작가에 대해 소개하는 것은 미술 감상의 전통적 방법론이었다. 그러나 안견은 근현대의 예술가와는 달리 도화서에 소속된 화원이었다. 따라서 <몽유도원도>를 감상함에 있어서 그 작품이 탄생한 맥락과 작품 제작을 명한 후원자, 그리고 소장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사라진 몽유도원도를 찾아서>가 주는 독서의 즐거움은 바로 이 지점에서 찾을 수 있다. 서문에 의하면 저자는 2009년의 ´한국박물관 100주년 기념 특별전´을 계기로 <몽유도원도>가 일본에 넘어가 덴리대학교에 소장된 경위를 추적하게 된다. 그리고 <몽유도원도>에 대해 알게 되면서, 작품의 행방 뿐 아니라 안평대군의 생애와 그 꿈의 해석, 찬문을 이해하는 데에 보다 집중하면서 연구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저자는 <몽유도원도>는 단순한 풍류로 인한 작품이 아니라 조선의 수성에 참여한 한 왕자가 자신의 천명을 보았던 한 편의 꿈을 기록한 그림과 문서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동시에 저자는 안평대군의 몰락 이후 <몽유도원도>가 어떻게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는지를 추적하였다. 이는 한국의 문화재가 일본에 어떠한 경위로 넘어가 일본의 문화재가 되는가에 대한 상세한 사례를 담은 보고서라고 볼 수 있다. 저자는 일본 측 문헌 기록과 소장자였던 시마즈 가문 후손들과의 인터뷰, 관련된 일본 역사에 대한 소상한 설명을 통해 한 편의 위대한 예술작품이 어떤 식으로 역사와 함께 호흡하며 한 시대의 문제작에서 역사적 유물로 그 의미와 가치를 더해 가는가를 보여준다.



▲ <안견과 몽유도원도>(안휘준 지음, 사회평론 펴냄). ⓒ사회평론

작품을 둘러싼 역사적 상황과 문화적 배경에 대한 관심이 이 저술 작업의 큰 줄기를 구성하고 있다는 점은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대한 또 다른 중요한 학술서적인 미술사학자 안휘준의 <안견과 몽유도원도>(사회평론 펴냄)와의 가장 큰 차별점이라고 볼 수 있다. <안견과 몽유도원도>가 화가 안견을 중심으로 안견의 생애와 화풍, 작품의 형식과 당대 화풍과의 관계 등 미술사학적 관점에서 작품을 분석한다면, <사라진 몽유도원도를 찾아서>는 <몽유도원도>라는 하나의 미술품의 생애사에 가깝다. 또한 미술 작품을 독립된 작품으로서가 아니라 큰 문화적 틀 안에서 바라보는 통합적 관점을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화가 안견이 아닌 안평대군을 <몽유도원도>의 중심에 놓고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따라서 이 책의 제목인 <사라진 몽유도원도를 찾아서>에서 사라진 것은 <몽유도원도>라는 작품뿐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조선조에서 지워진 위대한 예술 후원자이자 그 자신 예술가였던 안평대군의 생애와 업적, 그의 충절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몽유도원도>는 왕위 승계와 관련하여 세종의 뜻을 헤아리고 그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안평대군의 스스로의 운명에 대한 의지의 표명이었으며, <몽유도원도>가 계유정난 이후 그 존재 자체가 언급되지 않았던 이유 또한 그림의 태생이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안평대군은 세종기의 문화와 예술을 이끌어간 위대한 예술 애호가이자 그 자신이 조선조 전체를 통틀어 드문 시서화 삼절로 불리는 예술가였으나, 그의 부와 재능, 사람을 모으는 인기와 성품은 수양대군에게는 위협적인 존재였으며, 결국 계유정난과 더불어 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하였다. 저자에 의하면 오히려 김종서와 황보인 등의 재상과는 달리 안평대군에 대한 언급은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금기에 가까웠다고 한다. 안평대군이 복권된 것은 조선 후기, 정조 때에 이르러서였다. 이는 왕조의 정통성과도 긴밀히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그림이 안평대군의 다른 소장품들과는 달리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은 그 역사적 의미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다른 작품과 달리 정치적 의미가 강한 이 작품은 안평대군 자신에 의해 깊이 은닉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왜장에 의해 약탈되어 일본의 시마즈 가문에 보관되었다. 안평대군의 다른 소장품이나 작품, 장서들과 저택들은 불태워지고 훼손되었으며, 조선 세종조의 가장 화려하고 격조 높은 문화의 흔적은 이 땅에서 사라지고 잊혔다.



따라서 이 책 <사라진 몽유도원도를 찾아서>는 안평대군이라는 잊힌 조선 초기의 빼어난 예술 애호가이자 충신에 대한 헌사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저자는 세종 시대의 찬란한 조선 전기 문화의 한가운데에서 안평대군이 발휘했던 문화적 역량과 인품에 대해 많은 장을 할애하여 기술하고 있다. 안평대군은 학문의 애호자였으며, 시인인 동시에 당대 조선 최고의 명필이었다. 당대인들이 기술한 안평대군에 대한 기록을 읽는 것은 역사 속에서 잊혀 풍류를 즐기다 사사된 한 왕족으로 기록된 안평대군을 입체적인 모습으로 복원시킨다.



비해당 이용의 시는 당시를 얻었고, 그의 글은 진대의 자취를 얻었으며, 그의 화법은 또한 그 묘를 지극히 하여서 비록 삼절이라고 칭하던 자에게도 어찌 양보를 할 것인가"

-집현전 부수찬 이영서



"비해당은 천성이 총명하고 학문이 날로 새로워져 육경의 심오한 뜻을 연구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그 중에서도 시를 더욱 깊이 연구했다. 대저 깊이 체득했으므로 독실히 좋아했으므로 날마다 노래하고 읊조리는 일에 전념하여 그 시법의 오묘함이 옛사람보다 월등히 높았으니, 아! 훌륭하도다!"

-박팽년




▲ 계유정난을 배경으로 한 영화 <관상>(2013). ⓒ(주)주피터필름



저자는 안평대군의 시대를 다양한 방향에서 수많은 자료를 인용하여 그려낸다. 저택인 비해당과 별장인 마포나루의 담담정, 현세의 무릉도원인 창의문 밖의 무계정사 등 안평대군의 거처와 관련된 옛 기술들은 조선조 전기의 정원문화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능히 짐작하게 하는 매혹적인 장면이다. 거처인 비해당에 소장되었었다는 만여 권의 서책과 고금의 명화들, 안평대군의 시문과 그의 주도로 간행된 시집에 대한 설명들은 안평대군이 단순한 풍류가가 아니라 세종조의 문화와 학문을 주도하였던 큰 인물이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자료들이다.



저자는 안평대군의 몰락 과정 또한 소상히 기록하였다. 계유정난으로 인한 안평대군의 사사와 가문의 몰락, 안평대군이 구가했던 한 시대의 문화의 종말, 그리고 이후 조선조에서 안평대군이 잊히는 과정들은 담담하고 상세히 서술되어 있으면서도 저자의 슬픔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책의 후반부는 사라진 작품의 실제 행방을 추적하고 있다. 저자는 계유정난과 더불어 사라진 <몽유도원도>가 어떤 경로로 일본으로 옮겨졌으며, 어떻게 1900년대에나 되어서야 그 모습을 드러냈고 오늘날 덴리대학에 소장되기에 이르렀는가에 대해 설명하고 추리하며, 잘못된 일본의 기록에 의문을 표하기도 한다. 이 부분에서는 작품이 일본으로 흘러간 과정과 일본에서의 소장의 역사, 그리고 일본의 국보로 등록되는 과정 이외에도 작품의 장정 과정 등을 그리고 있어 예술품이 긴 세월과 다양한 소장자를 거치면서 문화재로서 새로운 의미를 얻어가는 과정이 흥미롭다.



아마도 독자들에게 가장 궁금한 부분은, ´그렇다면 이 조선시대의 가장 빼어난 걸작이며 역사적인 사료인 <몽유도원도>가 한국에 반환될 수 있는가?´에 대한 저자의 견해일 것이다. 저자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몽유도원도>를 감상하는 데에 단 30초만이 허락되었던 경험에서 느낀 분노가 가장 중요한 집필 동기였음을 언급한다. 또한 미술사학자 안휘준의 말을 빌려 이 작품은 반드시 한국으로 다시 반환되어야 할 중요한 문화재임을 주장한다. 그러나 저자는 무조건 반환을 요구하기 보다는 전직 외교관답게 하나의 문화재가 국제 관계에서 가지는 잠재력을 지적한다. 즉 <몽유도원도>는 한국 뿐 아니라 이미 일본에서도 한국학 연구에서의 중요한 문화재이며, 미래의 한일 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보물이라는 것이다.



저자가 보다 아쉬워하는 것은. 이 땅에 정작 안평대군을 추모하고 <몽유도원도>를 기릴 수 있는 장소는 없다는 점이다. 저자는 현재 한국에 남아 있는 소수의 안평대군의 흔적조차도 훼손되고 제대로 보존되고 있지 않음을 안타까워한다. 안평대군이 구가한 문화에 대한 재조명과 유적에 대한 보존은 사라진 <몽유도원도>의 복원 이상으로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점일 것이다.



안평대군은 도원기의 말미에 "훗날 이 그림을 보는 자가 옛 그림을 구해서 내 꿈과 비교해 본다면 필시 무슨 말이 있을 것이로다" 라고 남겼다. 이 말은 <몽유도원도>에 깃든 대군의 충절을 후세인들이 읽어주기를 바라는 안평대군의 염원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지금, 그것은 한 권의 책과 함께 우리의 몫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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