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저자와의 대화-‘사라진 몽유도원도를 찾아서’ 김경임 중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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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3-1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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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몽유도원도를 되찾아 오려면 그 그림에 대해 알아야죠”
김경임 중원대 교수(65)는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처음 봤을 때의 비애와 분노를 잊지 못한다. 2009년 9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한국박물관 100주년 기념 특별전’ 때였다. 이것은 일본 덴리대가 ‘몽유도원도’를 소장한 이래 세 번째 한국 나들이로 전시기간은 단 10일이었다. ‘몽유도원도’를 보기 위해 몇 시간을 기다린 관람객들은 각자에게 허용된 30초간 그림을 훑어본 뒤 쫓기듯 전시실을 떠나야 했다. 언제나 우리 곁에 두고 감상해야 할 조선 최고의 그림이 어쩌다 일본에 넘어갔으며, 왜 우리는 그것을 힘겹게 빌려와야 하는가.
김 교수는 1978년 여성 최초로 외무고시에 합격해 주튀니지 대사를 역임하는 등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외교 현장을 누빈 외교관 출신이다. 외교부 문화외교국장을 역임하며 문화재 반환 문제를 살펴왔던 그는 1990년대부터 ‘몽유도원도’에 관심을 기울였다. <사라진 몽유도원도를 찾아서>(산처럼)는 ‘몽유도원도’의 탄생과 실종, 그림의 주인공인 안평대군의 문화적 이상을 살핀 책이다.
안평대군은 세종의 셋째 아들이다. 건국을 넘어 수성으로 넘어간 세종 대는 조선 최고의 태평성대였다. 평화의 시대, 고귀한 혈통을 타고난 안평대군은 막대한 갑부이자 학문과 예술에 두루 뛰어난 지식인이고, 당대 최고의 예술품 수집가였다. 시·서·화에 두루 능했고 인품이 호방해 주변에 사람이 넘쳤다. 세종의 치세가 절정을 넘어가던 1447년(세종 29년) 4월20일 밤, 안평대군은 무릉도원을 찾는 꿈을 꾸었다. 도연명(365~427)이 <도화원기>에 소개한 무릉도원은 난세를 벗어나 정신의 자유를 추구하려는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이상향이었다. 중세의 지식인 안평대군에게 꿈은 그저 꿈이 아니라 계시였다. 도원에 대한 꿈을 통해 안평대군은 자신의 천성을 자각했고, 갈 길을 보았다. 현실의 어떤 부귀영화와도 바꿀 수 없는 이상이 그곳에 있었다. 안평대군은 당대 최고의 산수화가 안견에게 자신의 꿈을 그리도록 명했고, 그림이 완성된 뒤에는 최고 문사들을 초청해 찬문을 짓게 했다. ‘몽유도원도’는 조선 전기의 문화 성취, 지식인의 이상, 예술가의 열정이 집결된 최고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문종 즉위 이후 정치를 떠나 은거하려던 안평대군의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문종이 젊은 나이에 죽어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세종의 둘째 아들이자 안평대군의 연년생 형인 수양대군은 왕위 찬탈의 음모를 꾸민다. 조선 왕실의 이상인 적장자 계승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믿은 안평대군은 왕권을 거의 손에 넣은 수양대군의 회유를 거부한다. 결국 안평대군은 대역죄를 뒤집어쓴 뒤 절해고도 교동도로 쫓겨나 살해됐다. 그의 수집품은 파괴되거나 사라졌다. ‘몽유도원도’ 역시 사라졌다가 1893년 일본 정부의 인증서를 받는 자리에서 세상에 모습을 다시 드러냈다. 냉정한 힘의 논리가 작동하는 외교 현장을 지킨 외교관답게, 김 교수는 “약탈 문화재 환수를 주장하기 이전에 사실관계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몽유도원도’에 대해 알아야 환수를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안평대군에 관한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계유정난 이후 그의 자취가 대부분 파괴됐고, 이후에도 오랫동안 그의 삶과 생각을 복원하려는 노력이 없었다. 일어에 능통하고 한문을 독학으로 배운 김 교수는 한국, 일본의 각종 자료들을 모아 안평대군의 모습, ‘몽유도원도’의 유랑 과정을 추적했다.
김 교수는 “한국과 프랑스의 외교 관계에서 외규장각 도서 환수 문제가 최고의 이슈가 될지는 아무도 몰랐을 것”이라고 말했다.
‘몽유도원도’ 역시 마찬가지다. ‘몽유도원도’를 두고 한국, 일본이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양국의 관계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몽유도원도’는 “오늘날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세종 대의 상징이며 증거라는 점에서 한국 최고의 문화유산”이다. 세종 대의 시서화 작품이 한 편도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몽유도원도’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찾아와야 하는 대표적 문화재다. 김 교수는 “문화재에는 역사를 복원하는 힘이 있다”며 “ ‘몽유도원도’를 생각할 때마다 ‘우리가 이토록 훌륭한 전통을 물려받았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글 백승찬·사진 우철훈 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김경임 중원대 교수(65)는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처음 봤을 때의 비애와 분노를 잊지 못한다. 2009년 9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한국박물관 100주년 기념 특별전’ 때였다. 이것은 일본 덴리대가 ‘몽유도원도’를 소장한 이래 세 번째 한국 나들이로 전시기간은 단 10일이었다. ‘몽유도원도’를 보기 위해 몇 시간을 기다린 관람객들은 각자에게 허용된 30초간 그림을 훑어본 뒤 쫓기듯 전시실을 떠나야 했다. 언제나 우리 곁에 두고 감상해야 할 조선 최고의 그림이 어쩌다 일본에 넘어갔으며, 왜 우리는 그것을 힘겹게 빌려와야 하는가.
김 교수는 1978년 여성 최초로 외무고시에 합격해 주튀니지 대사를 역임하는 등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외교 현장을 누빈 외교관 출신이다. 외교부 문화외교국장을 역임하며 문화재 반환 문제를 살펴왔던 그는 1990년대부터 ‘몽유도원도’에 관심을 기울였다. <사라진 몽유도원도를 찾아서>(산처럼)는 ‘몽유도원도’의 탄생과 실종, 그림의 주인공인 안평대군의 문화적 이상을 살핀 책이다.
안평대군은 세종의 셋째 아들이다. 건국을 넘어 수성으로 넘어간 세종 대는 조선 최고의 태평성대였다. 평화의 시대, 고귀한 혈통을 타고난 안평대군은 막대한 갑부이자 학문과 예술에 두루 뛰어난 지식인이고, 당대 최고의 예술품 수집가였다. 시·서·화에 두루 능했고 인품이 호방해 주변에 사람이 넘쳤다. 세종의 치세가 절정을 넘어가던 1447년(세종 29년) 4월20일 밤, 안평대군은 무릉도원을 찾는 꿈을 꾸었다. 도연명(365~427)이 <도화원기>에 소개한 무릉도원은 난세를 벗어나 정신의 자유를 추구하려는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이상향이었다. 중세의 지식인 안평대군에게 꿈은 그저 꿈이 아니라 계시였다. 도원에 대한 꿈을 통해 안평대군은 자신의 천성을 자각했고, 갈 길을 보았다. 현실의 어떤 부귀영화와도 바꿀 수 없는 이상이 그곳에 있었다. 안평대군은 당대 최고의 산수화가 안견에게 자신의 꿈을 그리도록 명했고, 그림이 완성된 뒤에는 최고 문사들을 초청해 찬문을 짓게 했다. ‘몽유도원도’는 조선 전기의 문화 성취, 지식인의 이상, 예술가의 열정이 집결된 최고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문종 즉위 이후 정치를 떠나 은거하려던 안평대군의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문종이 젊은 나이에 죽어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세종의 둘째 아들이자 안평대군의 연년생 형인 수양대군은 왕위 찬탈의 음모를 꾸민다. 조선 왕실의 이상인 적장자 계승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믿은 안평대군은 왕권을 거의 손에 넣은 수양대군의 회유를 거부한다. 결국 안평대군은 대역죄를 뒤집어쓴 뒤 절해고도 교동도로 쫓겨나 살해됐다. 그의 수집품은 파괴되거나 사라졌다. ‘몽유도원도’ 역시 사라졌다가 1893년 일본 정부의 인증서를 받는 자리에서 세상에 모습을 다시 드러냈다. 냉정한 힘의 논리가 작동하는 외교 현장을 지킨 외교관답게, 김 교수는 “약탈 문화재 환수를 주장하기 이전에 사실관계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몽유도원도’에 대해 알아야 환수를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안평대군에 관한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계유정난 이후 그의 자취가 대부분 파괴됐고, 이후에도 오랫동안 그의 삶과 생각을 복원하려는 노력이 없었다. 일어에 능통하고 한문을 독학으로 배운 김 교수는 한국, 일본의 각종 자료들을 모아 안평대군의 모습, ‘몽유도원도’의 유랑 과정을 추적했다.
김 교수는 “한국과 프랑스의 외교 관계에서 외규장각 도서 환수 문제가 최고의 이슈가 될지는 아무도 몰랐을 것”이라고 말했다.
‘몽유도원도’ 역시 마찬가지다. ‘몽유도원도’를 두고 한국, 일본이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양국의 관계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몽유도원도’는 “오늘날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세종 대의 상징이며 증거라는 점에서 한국 최고의 문화유산”이다. 세종 대의 시서화 작품이 한 편도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몽유도원도’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찾아와야 하는 대표적 문화재다. 김 교수는 “문화재에는 역사를 복원하는 힘이 있다”며 “ ‘몽유도원도’를 생각할 때마다 ‘우리가 이토록 훌륭한 전통을 물려받았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글 백승찬·사진 우철훈 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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