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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몽유도원도는 왜, 어떻게 일본에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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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3-11-01 00:00 조회1,38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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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꿈결처럼 우리 곁에 왔던 <몽유도원도>(그림). 몇시간 기다림 끝에 30초 정도 친견이 허용됐다. 안평대군이 초여름밤 꿈에서 얼핏 본 무릉도원을 화가 안견이 사흘 만에 그렸다는 전설 같은 그림이다. <몽유도원도>는 1447년 그려져 6년 동안 세간에 존재하다가 1453년 돌연 사라졌다. 440년 뒤인 1893년 일본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어 곡절 끝에 덴리대학교에 비장돼 있다.


<사라진 몽유도원도를 찾아서>는 <몽유도원도>가 어떻게 탄생하였고, 어떤 곡절을 거쳐 현 소장자의 손에 이르렀는가를 추적한다. 그간의 몽유도원도 연구가 그림 중심이었다면, 이 책은 그림을 둘러싼 시간과 공간에 관한 연구다. 즉, 낙원에 해당하는 ‘도화원’이 안평대군을 통해 <몽유도원도>로 현현한 사건과 <몽유도원도> 그림이 400여년이란 잠복기를 거쳐 일본에서 불쑥 나타난 사건을 다룬다. 극적인 사건을 다뤄선지 추리소설처럼 흥미롭다.


황금기는 본디 잠깐. <몽유도원도>는 조선시대의 첫 황금기인 세종 말기에 태어난다. 아버지 태종의 골육상쟁을 지켜본 세종은 세손을 얻은 뒤 왕비와 세자빈을 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문종의 단명 뒤 수양대군의 쿠데타인 ‘계유정난’을 불렀다. 세종은 안평대군에게 ‘비해당’ 즉 게으름 없이 주군을 섬기라는 뜻의 호를 내리고, 수양대군에게는 백이·숙제가 왕위를 고사하고 숨어든 산이름으로 작호를 내렸다. 이에 안평은 백악 뒤에 무계정사를 짓고 몽유도원도를 걸어 권력에 뜻이 없음을 알렸다. 그 집터가 정룡(正龍)이 쇠하고 방룡(傍龍)이 흥함을 막는다는 풍수설도 한몫을 했다. 수양은 이를 방룡소흥(傍龍所興)의 땅, 즉 왕이 되려고 그 땅에 집을 지었다며 동생 안평을 역적으로 몰았다. <몽유도원도>는 피바람이 불기 이전 안평이 꿈꿨던 이상향이었던 셈이다.


지은이는 임진왜란 때 제4진으로 조선에 출병한 시마즈 요시히로가 경기도 고양현에 있는 절 대자암(大慈庵)에서 이 그림을 약탈한 것으로 추정한다. 대자암은 왕실의 원찰이고, 안평대군이 큰 후원자이기에 계유정난 전에 그림을 맡겼다고 본다. 요시히로 부대는 1592년 5월 말 임진강 전투 뒤 경기도 영평에 한가롭게 주둔한 적이 있다. 이때 종군 승려가 사쓰마 동부의 다이지사(大慈寺) 주지였음도 흥미롭다.


후반부에서는 <몽유도원도>의 유랑을 따라 일본 근현대사의 낯선 뒷골목이 펼쳐진다. 그림은 1800년대 목숨을 바쳐 본가를 지킨 시마즈 분가로 소유권이 옮겨져 70여년 동안 전승되었다. 1927~8년 15대 당주인 시마즈 시게마로가 쇼와공황으로 파산해 3000만엔을 받고 후지다 데이조한테 저당잡힌다. 이후 소노다 사이지, 소노다 준, 마유야마 준키치를 거쳐 덴리대학으로 넘어간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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