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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신문] 조선 걸작 ´몽유도원도´ 500년 유랑의 역사 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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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3-11-01 00:00 조회1,17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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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탄생 역사적 배경과 시대상황

- 안평대군 삶과 문화적 이상 따라가며

- 그 속에 담긴 의도 사상 문화 등 진단

- 일본 박물관 소장 과정까지 파고들어



최근 개봉한 영화 ´관상´의 핵심 사건은 1453년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이었다. 이 영화에서는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과 좌의정 김종서의 대결이 중심 스토리를 구성한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일 뿐. 실제 역사에서 계유정난은 수양대군의 반대편에 두 명의 인물이 존재한다. 영화에서 주요 인물로 등장했던 김종서와 등장하지 않았던 안평대군이다.



세종의 셋째 아들이자 수양의 바로 아래 동생인 안평대군은 그 비극적 삶의 궤적으로 역사가들과 후세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사고도 남는 인물이지만, 그를 이야기할 때 또 하나 빠트릴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우리 회화 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꼽힐 뿐 아니라 조선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미술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 안견의 ´몽유도원도(사진)´이다. 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도원의 모습을 15세기 중반인 1447년 당대 조선 최고의 화가인 안견이 3일 만에 그렸다는 그림이다. 그런데 이 그림은 현재 국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 덴리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단종과 더불어 우리 역사에서 대표적인 비극적 인물로 꼽히는 안평대군의 삶과 마찬가지로 몽유도원도 역시 역사의 격랑 속에서 수많은 유랑 끝에 일본의 한 대학교에 몸을 숨기고 있다. 아직도 서슬 퍼런 칼날을 피해 숨어지내야만 하는 운명인 것처럼.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하고도 외교관이라는 다소 전공과 동떨어진 직업을 가졌던 김경임 중원대 교수의 책 사라진 몽유도원도를 찾아서는 이 그림의 탄생에서부터 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의 유랑 과정까지 집요하게 추적한 역작이다. 그림이 탄생하게 된 역사적 배경과 시대상황, 인물, 그림 속에 담긴 철학과 정신 등 내용이 풍성하다. 그동안 나온 몽유도원도 관련 연구와 저술이 그림의 화풍이나 내용 분석에만 치중돼 있었던 것에 반해 이 책은 몽유도원도에 담긴 사상적 문화적 시대적 배경까지 분석한 최초의 저작으로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꿈의 주인인 안평대군의 삶과 문화적 이상향을 추적해 그 그림에 담긴 의도를 밝혀내는 저자의 노력은 우리 문화예술사 연구의 지평을 한 단계 넓힌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그림 속에 담긴 안평대군의 이상향은 은인자족하는 은자의 삶을 나타내는데, 이는 현실 정치에서 벗어나려는 그의 바람이기도 했지만 권력야욕을 서서히 드러내던 둘째 형 수양대군에 대한 은근한 경고의 메시지이기도 했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저자는 파리 유네스코 한국대표부 근무 경험과 외교통상부 문화외교국장, 주튀니지 대사 등을 거치면서 우리 문화재의 약탈사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던 중 2009년 9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처음으로 국내에 공개된 몽유도원도를 보려고 몇 시간이나 줄을 섰다가 단 30초만 관람이 허용됐던 것에서 비애와 분노를 느끼고 본격적으로 이 그림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20대 초반 이미 시(詩) 서(書) 화(畵)에 능해 삼절로 불렸으며 그 빼어난 재주와 문화적 감수성에도 불구하고 종묘사직의 보호를 위해 끝내 형인 수양대군의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다가 희생당한 안평대군의 비극적 삶과 맞닥뜨린다. 그는 타고난 재능과 고귀한 신분에서 하루아침에 역적으로 몰려 강화도를 거쳐 교동도로 유배됐다가 사사 당한다. 결국 시신조차 오간데 없이 사라져버려 묘비는 물론 묘조차 남기지 못했다.



그의 운명처럼, 안평대군의 몰락과 동시에 자취를 감췄던 몽유도원도는 메이지유신 이후인 1893년 일본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이후의 부침을 겪는 과정을 읽어가는 동안 독자들은 단순한 그림이 아닌 뼈아픈 역사의 증거물로서 몽유도원도를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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