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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몽유도원도, 그 유랑의 시간을 추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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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3-11-01 00:00 조회1,24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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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창용 기자 = 1929년 여름 무렵 한 일본인 사업가가 중국학자이자 동양고미술의 권위자로 정평이 난 나이토 고난을 찾아가 고서화 하나를 보여주었다.



나이토 고난은 첫눈에 그림의 진가를 알아보았다. 그림의 오른쪽 하단에는 ´지곡 가도작´이라는 붓글씨 서명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가도(안견의 자)´라는 붉은 도장이 선명했다.



화가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였다. 나이토 고난은 얼마 후 ´조선 안견의 몽유도원도´라는 5쪽짜리 논문을 써 일본 월간지 ´동양미술´에 발표했다.



이 글은 ´몽유도원도´가 존재한다는 것을 세상에 알린 최초의 글이었다. 계유정난(1453) 때 안평대군과 함께 사라졌던 이 서화가 세상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김경임 중원대 교수가 쓴 ´사라진 몽유도원도를 찾아서´는 우리 회화 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몽유도원도´의 탄생 배경과 유랑의 시간을 추적한 책이다.



정묘년(1447년) 4월 어느 날 밤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은 복사꽃 가득한 무릉도원을 이리저리 거니는 꿈을 꾼다. 기이한 꿈에 놀란 그는 이를 당대 최고의 화가 안견에게 그리게 해 사흘 만에 ´몽유도원도´가 완성된다.



그로부터 6년 뒤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은 안평대군과 김종서의 반역을 평정한다는 명목으로 계유정난을 일으킨다. 수양대군은 단종을 보필하던 대신들을 주살하고, 안평대군은 강화도로 압송한 뒤 교동도로 이송했다.



수양대군의 회유를 거절하고 교동도에서 죽음을 선택한 안평대군은 유체도 무덤에 관한 기록도 없다. 안평대군이 희생되면서 ´몽유도원도´ 역시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그러다가 150년 뒤 임진왜란 때 이 서화 작품은 약탈당해 일본으로 건너가 300여 년 동안 숨겨져 왔고, 1893년 일본 가고시마의 한 가문에 의해 세상에 나타난다.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지금은 덴리대학에 소장돼 오늘에 이르렀다.



김 교수는 이 책에서 우선 ´몽유도원도´의 시대적·사상적·문화적 탄생 배경을 살펴보며, 꿈의 주인인 안평대군의 삶과 문화적 이상을 추적해 그림에 담긴 의도를 밝혀낸다.



아울러 일본 학자들의 연구 결과물에만 의존해 ´몽유도원도´를 해석하는 수준을 넘어 처음으로 한국 연구자의 시각으로 ´몽유도원도´를 총체적으로 조명했다.



파리 유네스코 한국대표부에서 근무했던 저자는 ´몽유도원도´가 한국이 회복해야 할 해외 문화재 가운데 첫손가락에 꼽히는 문화재라는 점에 동의하면서도 맹목적인 환수를 주장하지 않는다.



그럴 수도 없다. ´몽유도원도´는 이미 일본과 덴리대학에서 중요문화재로 지정한 상황이기 때문에 돌려달라고 해서 쉽게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김 교수는 그보다는 ´몽유도원도´가 독도 문제 등으로 악화한 한국과 일본 양국 간의 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매개체로서의 가능성에 주목한다.



"´몽유도원도´는 일본 땅에 건너간 이후부터 어쩔 수 없이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관계에 들어섰으며, 오늘날 한국학의 자산으로서 덴디대학에 소장된 이 서화는 본격적으로 한일관계에 영향을 미칠 잠재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덴리대학은 한일관계를 위한 막강한 자산을 가지고 있으며, 이 자산은 향후 한일 관계의 가교로서 양국 간 우호의 진전에 큰 힘을 발휘할 것임에 틀림이 없다."(382쪽)



산처럼. 416쪽. 2만2천원.



chang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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