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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몽유도원도에 얽힌 운명과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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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3-11-01 00:00 조회1,21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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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도원도(1447년·사진)는 단순히 ‘잃어버린 국보급 미술품’만이 아니다. 조선의 황금기인 세종 치세의 시대정신이 세종의 셋째 아들이자 조선예단의 아폴론이나 다름없었던 안평대군(1418∼1453)의 꿈으로 투사되고 발현된 종합예술품이다.



그 형상을 담아낸 화가가 조선 3대 화가로 꼽히는 안견이며, 작품이 그의 보기 드문 대작이라는 것은 중고생 수준의 이해다. 그림의 정수를 담아낸 23편의 시문을 쓴 인사가 당대 최고의 명필 안평대군을 필두로 김종서 정인지 최항 신숙주 성삼문 박팽년 서거정으로 이어지는 세종의 브레인들이기에 더 값지다는 인식은 대학생 수준이다.




이 책은 그 이상을 넘본다. 몽유도원도에 얽힌 인물과 그들의 엇갈린 운명, 그림 속에 담겨진 동아시아 이상향의 문화적 계보도, 그리고 그 수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그림의 감춰진 행로까지 흥미진진하게 재구성한다.



몽유도원도가 완성되고 6년 뒤인 1453년 수양대군(세조)이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하는 과정에서 안평대군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면서 그림의 행방도 역사에서 사라진다. 그러다 470여 년 뒤인 1929년 일본학계에 그 실체가 보고된다.



외교통상부 문화외교국장과 튀니지 대사를 지낸 저자는 일본 사쓰마 번(가고시마 현)을 700년간 다스린 시마즈 가문이 이를 소장해왔음을 토대로 이 그림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 과정을 추적한다. 시마즈가의 17대 당주인 시마즈 요시히로는 임진왜란 때 주로 경기 북부에 오래 주둔한 왜군사령관이었다. 경기 북부에는 조선 왕실사찰이자 선종 최대 사찰이었던 대자암(大慈庵)이 있었는데 안평대군은 이 사찰의 주인이나 다름없었다.



사쓰마에도 다이지지(大慈寺)라는 동명의 사찰이 있었고 그 주지는 시마즈를 따라 임진왜란에 종군까지 했다. 저자는 이를 토대로 몽유도원도가 대자암에 감춰져 있다가 시마즈의 수중에 들어갔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책을 읽다보면 몽유도원도야말로 조선이 잃어버린 순수함의 표상인 동시에 그 좌절을 암시하는 오브제라는 생각이 든다. 이야말로 조선의 이상과 현실의 어긋난 심연을 드러내는 초현실적 백일몽이자 ‘억압된 것은 귀환한다’는 정신분석학의 명제를 입증하는 살아있는 증거 아니겠는가.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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