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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승정원일기는 스토리텔링 소재의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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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1-03-10 00:00 조회1,47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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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호가 만난 사람] “승정원일기는 스토리텔링 소재의 보고”







ㆍ‘승정원일기 홍보대사’ 박홍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조선 세조 때 공신 홍윤성은 부인이 있는 데도 양주 좌수의 딸을 탐냈다. 처녀는 첩이 아니라 정식 아내로 맞아들일 것을 요구했고, 홍윤성은 이를 들어주기로 하고 숭례문 밖에 집을 구해 함께 살았다. 홍윤성이 죽은 뒤 적처 자리를 놓고 큰 다툼이 벌어졌다. 후처는 모든 면에서 불리했지만 기발한 아이디어로 승부했다. 국사편찬위원회 박홍갑 편사연구관 등이 최근 펴낸 <승정원일기>(산처럼)에 나오는 대목이다.



좌수의 딸이 내민 결정적인 무기가 ‘승정원일기’다. 좌수의 딸은 언젠가 세조가 홍윤성을 따라 자신의 집에 와서 술을 마신 적이 있다. 이를 기록한 승정원일기에 ‘부인’이 술을 쳤다고 했는지 ‘첩’이 술을 따랐다고 했는지 확인해 보면 누가 적처인지 알 것 아니냐고 한 것이다. 승정원일기를 조사해 보니 과연 ‘부인’이라고 기록돼 있었다. 사건
심리를 하던 성종은 어쩔 수 없이 2명 모두를 적처로 인정하고 재산을 반씩 나누게 했다고 한다.



홍윤성 적처 다툼은 승정원일기의
성격을 아주 쉽고 재미있게 알려 주는 예화다. 승정원은 왕의 비서 기관이다. 요즘으로 치면 청와대비서실에 해당한다. 따라서 왕의 언동과 정사를 기술한 승정원일기는 오늘날의 대통령 기록에 비유할 수 있다. 말하자면 승정원일기는 국정 운영 전반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날짜순으로 망라한 공식 기록이다. 왕도 꼼짝 못할 전례이자 증거 자료로서 권위를 지닌다. 게다가 왕에게 누가 술을 따랐는지까지 기록할 정도로 내용이 세세하다.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꽃’으로 흔히 ‘조선왕조실록’(이하 실록)을 든다. 그러나 승정원일기에 비하면 실록은 요약본에 불과하다. 실록도 한글 번역본의 분량이 4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기록이지만 승정원일기는 이보다 5배나 많다. 3245책 2억4250만 자가 남아 있는 승정원일기를 실록처럼 한글 번역본으로 출간한다면 2000권은 족히 될 듯하다. 조선 말고는 세계 어느 나라도 이런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이번
인터뷰는 승정원일기 이야기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듯이 아무리 좋은 콘텐츠도 접근과 이용이 가능한 상태에 있어야 진정한 자산이 된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다. 나쁜 소식은 승정원일기가 아직 한글로 번역되지 않아 전문 연구자가 아니고서는 활용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좋은 소식은 원문을 디지털화해 웹으로 서비스하는 국편의 ‘정보화 사업’이 거의 마무리 단계에 있고, 한국고전번역원이 한글 번역에 착수했다는 것이다.



덤으로 좋은 소식 또 하나. 승정원일기를 소개하는 성인용 대중서가 나왔다는 것이다. 앞에 소개한 <승정원일기>가 그것이다. 국편의 정보화사업에 참여했던 박홍갑 연구관과 최재복 편사연구사, 국민대 강사인 이근호 박사가 함께 썼다. 저자들을 대표해 박 연구관을 2월 2일 만났다.



그동안 승정원일기를 다룬 대중서가 없었습니다. 왜 그랬는지, 이번에 책을 내게 된 취지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조선시대 연구자라면 승정원일기에 관심을 가지는 게 당연하죠. 다만 내용이 아주 방대하다 보니까 연구자들도 필요한 부분만 찾아서 보는 정도였습니다. 2001년부터 국편의 정보화사업에 참여하면서 승정원일기의 매력에 빨려 들어갔어요. 우리의 전통문화 가운데 기록문화가 가장 우수하고, 기록문화 가운데에서도 정수가 승정원일기 아닙니까. 그런데 일반 국민은 실록은 알지만 승정원일기는 잘 모르거든요. 국민들에게 승정원일기가 무엇이며 어떤 가치를 지닌 것인지를 알리자는 뜻에서 경향신문에 ‘승정원일기를 읽는다’는 제목으로 연재하게 됐고, 이걸 토대로 이번에 단행본으로 낸 겁니다.”



지금 시점에서 승정원일기는 어떤 가치가 있습니까.

“가장 큰 장점은 실록이나 다른 데서 볼 수 없는 자세한 기록이 있다는 겁니다. 실록은 임금이 죽고 나서 기록을 재가공하고 재편집한 것이지만 승정원일기는 임금을 따라다니면서 그때그때 기록한 것입니다. 내용이 방대하고, 마치 비디오 녹화 영상을 보듯이 생생하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이자 장점이죠. 이렇게 통치사료를 현장에서
속기록으로 남긴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승정원일기에는 국정 운영과 관련된 모든 정보뿐만 아니라 그날의 날씨와 천재지변, 왕의 병증과 처방, 왕과 신하들의 신상과 언동 등이 실려 있다. 역사학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의 연구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는 게 박 연구관의 얘기다. 예를 들어 날씨 정보는 기상학자, 왕의 질병에 대한 내용은 한의학자, 서술 방식의 변화는 언어학자에게 각각 유용하다.



요즘 글로벌 이슈인 기후 변화에 대한 자료로서 좋을 것 같네요.

“서양에서 1500년대 후반부터 1750년대까지가 소빙기라고 하는 이론이 나왔죠. 서양에서는 꽃가루나 나이테, 해수면 변화를 대상으로 밝혀낼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승정원일기에는 소빙기에 해당하는 시기의 날씨 정보가 고스란히 다 담겨 있거든요. 국내 학계에서는 아직 소빙기 연구가 제대로 안 돼 있는데 승정원일기를 잘 활용하면 무궁무진한 연구 결과를 도출할 수 있을 겁니다.”








“실록의 경우 후대에 재편집하기 때문에 임금이 조금 실수한 것은 감춰질 수 있어요. 승정원일기에는 임금이 잘못하거나 우왕좌왕한 것까지도 생생하게 남아 있거든요.”






한의학 정보의 보고라고도 했는데….

“임금 중심으로 기록하다 보니까 임금이 어떻게 아프고 어떻게 탕약을 조제했는지에 대한 내용이 상세해요. 한의학 측면에서도 당시 첨단의술과 최고 의료진인 어의들의 처방이 고스란히 적혀 있고, 그런 처방에 대한 결과도 나와 있으니까요. 이런 측면에서 아주 유용한 자료죠.”



책을 보니 재미있는 내용이 많더군요. 우리 문화산업을 살찌우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워낙 방대하고 자세하게 기록돼 있어 재미있는 내용이 많아요. 우리 문화 콘텐츠로서 그만이죠. 특히 이야기 산업은 돈이 되지 않습니까. 미국 할리우드 같은 데서는 돈 될 만한 스토리텔링을 전부 사서 재가공해 전 세계에다 팔아 먹잖아요. 승정원일기는 스토리텔링 소재를 발굴해 내는 데 더없이 좋은 자료입니다.”



박 연구관이 특히 자랑하는 승정원일기의 가치가 바로 이것이다. 영화 <왕의 남자>, 드라마 <대장금>, 소설 <상도> 등과 같은 역사물의 성공이 이를 뒷받침한다. 실록에서 장금은 아홉 번, 공길과 임상옥은 각각 한 번 언급된다. 승정원일기는 실록보다 이들에 대한 내용을 훨씬 많이 담고 있겠지만 확인이 불가능하거나 지금으로서는 어렵다. 연산군(공길)·중종(장금) 대의 것은 임진왜란 때 소실됐고, 순조(임상옥) 대의 것은 아직 정보화작업이 이뤄지지 않아 온라인으로는 검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승정원일기가 매우 방대한 데다 한글 번역이 이뤄지지 않아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에게는 ‘그림의 떡’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전문 학자나 한문에 익숙한 사람밖에 접근할 수 없는 게 가장 큰 단점이에요. 실록은 번역이 다 돼 공길이가 이렇게 있었구나, 장금이가 중종한테 뭘 어떻게 잘해서 하사받았구나 하는 내용을 일반인도 알 수 있지만 승정원일기는 그렇지 못하잖습니까. 가장 시급한 게 번역입니다. 그러나 양이 워낙 방대하다 보니 지금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해 있는 거죠.”



번역해 서비스할 수 있는 시기를 언제로 보고 있습니까.

“지금 시스템대로 간다면 30년 이상 걸리지 않을까 해요. 고전번역원에서 고종 대와 인조 대의 것을 하다가 지금은 영조 대로 왔어요. 영조 20년 이전 부분은 소실됐다가 복구한 것이어서 자료가 부실하잖아요. 특히 영·정조 시대가 우리 역사에서 르네상스 시기니까 좋은 기록이 많을 겁니다. 영조 대에 맞춰 번역하는 것은 잘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정조 대가 먼저 번역돼 웹에 서비스되면 일반인의 이용이 많을 것이고, 승정원일기도 많이 알려질 것 같아요.”



승정원일기를 얼마나 읽었습니까.

“평생을 읽어도 다 못 읽죠. 책을 쓰면서도 가장 골치 아프고 문제가 된 것이 작은 단행본에 내용을 얼마나 소개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어요. 승정원과 승정원일기, 그리고 우선 눈에 띄는 에피소드를 소개한 정도죠. 정보화작업을 하면서 메모해 둔 것을 가지고 쓴 것입니다.”



부제를 ‘소통의 정치를 논하다’라고 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인간이 살면서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다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지 않습니까. 지금도 부부간에 살면서도 소통이 안 된다고 하잖아요. 요즘 와서 소통 문제가 많이 얘기되는데 이런 이유 때문에 그 주제를 택한 것은 아니에요. 임금의 숨소리까지 담아 낸 자료라는 데서 출발했습니다. 영조가 세금정책을 정할 때 일일이 대신이나 상인을 불러 의견을 듣는 장면이 있었어요. ‘아, 이게 진정한 소통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영조는 카리스마가 강하고 신하들을 몰아치는 등 매우 독단적인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런 자료를 보니까 이런 식으로 정치해야 백성들이 좀 더 편하게 살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부제목을 그렇게 뽑았죠.”

승정원일기는 국보 303호이고, 2001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도 등재됐다. 우리나라 세계기록유산은 실록과 승정원일기를 포함해 7건이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숫자로는 세계에서 6번째로 많고, 아시아에서는 첫 번째다.

실록과 승정원일기는 비슷한 점도 있지만 많은 점에서 차이가 있다. 둘 다 거의 같은 자료를 이용하기 때문에 중복되는 내용이 많다. 실록은 사관, 승정원일기는 승정원 주서가 각각 입시해 왕의 언동을 기록하는 것도 비슷하다. 가장 큰 차이라면 승정원일기는 실록 편찬 때 원자료로 이용하지만 사초나 시정기처럼 세초(洗草)하지 않고 보존한다는 것이다. 실록은 왕의 임의적인 열람이 불허되지만 승정원일기는 허용된다는 점도 다르다. 자료 폐기와 왕의 열람 제한을 통해 직필을 보장하면서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원자료를 하나 정도는 남겨 놓는 시스템이다.



조선은 가히 ‘기록의 나라’라고 할 만하네요.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의 체계와 치밀함은 지금의 기록 관리 시스템을 뺨칠 정도입니다.

“우리나라의 기록문화는 다른 나라가 거의 따라올 수 없을 정도지요. 명나라나 청나라, 일본, 베트남도 실록을 만들었지만 우리 실록과 비교하면 애들 장난 수준이에요. 실록을 단 4부 만들었는데 필사가 아닌 인쇄를 했고, 그것을 산속 깊이 보관하고 임금도 못 보게 만들었잖아요. 못 보게 하는 것은 직필을 보장하는 것이거든요. 선조들은 기록해서 후손들에게 남겨야 한다는 정신이 투철했던 것 같아요.”



그런 기록정신이 어디서 나온 것 같습니까.

“기록을 남기고 싶은 건 인간의 본능이기도 하지만 결국 자긍심 아닐까요. 남이 봐서 부끄럽다면 기록으로 남기고 싶지 않겠죠. 바른 역사를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도 있어야 하고요. 실록의 경우 후대에 재편집하기 때문에 임금이 조금 실수한 것은 감춰질 수 있어요. 승정원일기에는 임금이 잘못하거나 우왕좌왕한 것까지도 생생하게 남아 있거든요. 이런 것을 보면 유교 정신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정론직필의 주체는 왕의 곁에서 언행을 낱낱이 기록한 사관과 주서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왕의 말을 실시간 한문으로 번역해 적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속기사와 동시
통역사의 능력을 동시에 갖춰야 가능하다. 문과 급제자 가운데에서 성적이 뛰어나고 혈통이 좋은 인물이 주로 선발됐다. 사관과 주서 자리는 일은 고되지만 승급이 보장되는 엘리트 코스였다.



사관과 주서는 대단한 능력자 같습니다. 동시통역과 속필 가운데 한 가지 재주도 지니기 어려울 텐데요.

“기본적인 요구 사항이 재(才)·학(學)·식(識)인데 이를 삼장(三長)이라고 합니다. 재는 재주, 학은 배운 정도, 식은 판단력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를 두루 갖춘 사람이 사관이나 주서를 할 수 있는 거죠. 임금이 저만큼 떨어져 있는데 구석에서 들릴 듯 말 듯 모기 만한 소리로 말하는 사람도 있고, 서로 말을 끊어가며 언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걸 바르게 기록해야 하지 않습니까. 제·학·식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식이 아닌가 해요. 아무리 재주가 있고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하더라도 상황에 맞게 정확한 판단을 하기는 어렵죠. 역사는 자기가 본 대로 기록할 수밖에 없거든요. 기록을 어떤 식으로 남기느냐는 ‘식’에서 결정될 소지가 많다고 봅니다.”



조선시대에 꽃핀 기록 전통이 무너지고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되레 기록 후진국으로 전락한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봅니까.

“우리 사회가 너무 급격하게 변했다고 할까요. 타의에 의해 서구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전통적인 유교문화와 많은 갈등을 겪지 않았습니까. 그런 과정에서 기록 전통도 많이 훼손된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일본에 의한 기록 말살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를 제외한 4대 사고의 전적들이
전화와 함께 사라졌다. 이 가운데 충주사고와 성주사고는 왜군이 불태운 것이고, 고려실록도 이때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왜군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조선 초기부터 선조 대까지의 승정원일기도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뒤 다시는 복구되지 못했다. 그 뒤에도 승정원일기는 여러 차례 수난을 겪었다. 이괄의 난(1624), 영조 20년(1744), 고종 25년(1888)의 화재와 순조 연간의 분실 등으로 많은 부분이 없어졌고, 그때마다 개수·복원했다. 지금 남아 있는 승정원일기는 인조 원년(1623)부터 순종 융희 4년(1910)까지 288년 동안의 반쪽짜리 기록이다. 물론 이마저도 단일 기록으로는 세계 최대의 역사 기록이다.



<글·신동호 기획위원, 사진·김석구 기자>





**기사 링크
newsmaker.khan.co.kr/khnm.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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