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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근대문학의 비극적 풍운아 월북 후 반역자로 몰려 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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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04-22 00:00 조회1,40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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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100주년 앞두고 시·소설·평론 모아 펴내

햄릿 국내 최초로 번역… “한국 천재작가 명성”









  • 천재적 글쟁이로 이름을 날린 인물이 이데올로기의 논리에 함몰돼 사라진 것은 비운이다. 그런 인물들은 시대를 잘못 타고난 탓에 하늘이 내린 문학적 재능을 썩히곤 한다. 좌절과 혼돈의 시대였던 해방 공간에서, 민족의 비극과 시대의 아픔을 노래한 작가들 가운데 설정식이라는 인물을 빼놓을 수 없다. 그 시대에 설정식만큼 재능이 번뜩인 인물도 드물다. 시인 정지용마저도 설정식의 행보에 대해 “프롤레타리아 시인이라는 등의 평가는 단편적이며, 그 시대를 살아가는 지성인으로서 당연한 태도였다”고 평가했을 정도다. 오는 5월 설 작가의 탄생 100주년을 맞는다. 그의 시편과 소설, 평론, 번역물을 한데 모은 책이 나와 그를 재평가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설 작가의 3남 희관씨가 엮어내고 산처럼이 펴냈다.










    설희관 엮음/산처럼/4만5000원



    설정식 문학전집/설희관 엮음/산처럼/4만5000원




    미국 유학으로 남보다 먼저 서양 문물을 접할 수 있었던 설정식은 해방 직후 미 군정청의 관리이자 조선문학가동맹의 맹원이었다. 낮에는 미군 관리로서, 밤에는 좌익 편향 활동을 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당시엔 암물한 민족의 앞날을 밝혀줄 이념으로 무정부주의 또는 사회주의가 유일한 방책이라는 사조가 팽배했던 시대였다. 시대를 내다보는 지식인으로서 이해할 만하다.



    설정식의 부친 설태희는 함남 단천에서 이름있는 선각자였다. 일제 강점기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전개한 깨어있는 유학자였다. 정식의 둘째 형 설의식은 당대 문필가로 동아일보 편집국장 재임 중 손기정의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국장직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이른바 뼈있는 집안 출신이다. 굴곡진 설정식의 삶은 이런 지사적 기질이 강한 집안 내력에서 이어진 듯하다.



    그는 일찌감치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신음하는 민족적 현실에 눈을 뜬다. 경성공립농업학교(서울시립대 전신) 재학 중 1929년 광주학생의거에 가담해 퇴학당한 뒤 만주로 갔다. 1930년대 만주 펑톈(봉천) 제3고급중학교 시절에는 일제의 농간으로 빚어진 한인과 중국인 싸움에 끼어들다 도망자 신세가 되기도 했다.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설정식은 국내로 들어온 이후, 각종 문학 경연에서 1등을 차지하는 등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미국 유학은 이 시절에 떠났다.



    설희관 엮음/산처럼/4만5000원

    통역관 설정식(맨뒤쪽)이 개성 휴전회담장 부근에서 북한군 대표단과 지프를 타고 있다.

    그는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남로당 일파들과 월북한 이후, 휴전 회담에서 통역관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1953년 김일성 일파가 주도한 남로당 숙청 바람에 휘말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임화 이강국 이승엽 이원조 등과 함께 설정식도 체포돼 ‘미제 스파이’란 죄명을 뒤집어쓰고 41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스스로 찾아간 이념의 고향에서 반역자로 몰려 처형되고 마는 한국 근대문학의 비극적 풍운아였다.



    설정식을 알았던 문인들은 그를 천재로 기억한다. 해방 이후 그가 본격 문학활동을 했던 시기는 4년여에 불과하지만 빼어난 창작 활동이었다. ‘햄릿’을 국내 최초로 번역했고, 시와 소설은 헝가리 등 유럽에도 알려져 한국이 낳은 천재작가로 이름을 드날렸다.



    설정식이 미군정청에 근무하던 30대 중반 시절 경복궁에서 찍은 사진.

    한국 문학사에서 설정식만큼 다채로운 이념 스펙트럼을 보인 이도 드물다. 1946년 5월 3일부터 10월 16일까지 한성일보에 연재된 ‘청춘’이나, 그해 12월 동아일보에 연재된 단편 ‘프란씨쓰 두셋’ 등은 설 작가의 자전 소설이다. 식민지 조선의 젊은이가 짊어진 시대적 고민과 고뇌가 이 작품들에 고스란히 스며 있다. 설정식의 소설과 시는 시대의 격랑 속에 몸을 싣고 쓴 작품들이라 때론 몹시 거칠고 관념적이다. 하지만 민족에 대한 순진무구한 문학도의 심정이 절절히 배어 있다.



    ‘조사’ ‘진혼곡’ 같은 시를 통해 일제의 만행을 통렬히 고발한다. 그런 종류의 소설로는 ‘제신의 분노’를 꼽을 수 있다. 이 글에선 조국의 현실에 대한 분노와 민족의 장래를 예언자적 어조로 그려낸다. 그러면서 민족국가 수립이라는 과제와 해방공간이라는 분위기에서 지식인을 깨우치고 있다.



    그의 조카 사위인 이화여대 김우창 석좌교수는 “그의 작품에는 독립자주의 민족 이념, 민주주의,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사상적 순수성을 강렬히 드러낸다”면서 “당대의 현실을 파악한 정열의 순수함이 정치 투쟁의 무자비한 가시에 찔려 피를 흘리고 쓰러지게 된 것은 비극”이라고 평가한다. 이런 작품으로는 시 ‘붉은 아가훼 열매를’이 대표적이다. 설정식 역시 월북 작가들에서 흔히 드러나듯이 혁명적 낭만주의라는 한계를 보여준다.



    해제를 쓴 아주대 곽명숙 교수는 “문학이 정치에 복무하고 예속함으로써 예술가 자신과 예술 작품이 어떠한 파국을 맞을 수 있는지 설정식의 삶과 문학은 하나의 증언이 된다”고 풀이했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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