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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미션] 진정한 웰빙 / 『기계, 인간의 척도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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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1-07-04 00:00 조회1,26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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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이후가 되면서 유럽사회에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것은 교회의 세속화에 염증을 느끼고 개혁을 요구하는 세력, 아예 교회를 이탈하는 세력 등이었는데, 이들에 의해 인간에 대한 재해석이 시도되었다. 이른바 근세를 태동시킨 인본주의다. 18세기가 되면서는 이성의 힘을 신격화하고 그 힘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김용진 교수©뉴스미션

그것이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자연과학적 힌트와 지구촌 구석구석에서 발견한 재원들의 결합으로 태동된 근세이다. 그러나 근세라는 영양분을 토대로 성장한 현대는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엄청난 변화를 안겨 주었다. 그렇지만 풍요로움과 편리함이라는 달콤함만이 아니라 인류가 예측하지 못했던 난제들도 발생하기 시작했다.



과학 기술의 급격한 발전과 더불어 생산력의 갑작스러운 향상으로 잉태된 과잉생산의 후유증도 그 예이고, 인간 소외현상으로 기인한 비인간화도 그런 영향 때문이다. 땅도 거름이 많으면 농사를 망치게 되고 인체도 영양이 과하면 도리어 병의 원인이 된다.



이처럼 생산력의 증가로 말미암아 과잉 생산되어 누적되는 산더미 같은 생산품들을 소비시키는 시장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해결책이 아이러니하게도 수많은 생명들을 몰살시킨 세계 1, 2차 전쟁이었다.



인간을 위한 복지 세상을 만들겠다던 과학기술이 인간을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손쉽게 살육할 수 있는가를 연구하는 무기 제조에 몰입하고,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으로 참살하는 전쟁을 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기술과학을 추종하던 인간들의 잔꾀로 인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두 번에 걸친 세계 전쟁은 <기계, 인간의 척도가 되다>라는 책의 저자인 마이클 에이더스의 지적처럼 ‘과학과 기술의 옷을 입은 전문화한 인간 도살 산업’이었다.



한때 산업사회의 모토였던 ‘인간에게 풍요로움을 안겨주는 복지사회 실현’이라는 프로젝트가 결국 인간이 자기와 닮은 인간을 대량 살상하는 비인간적 행위가 정당화되고 장려되는 괴상한 세상을 태동시킨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지금까지 과학기술은 그들의 말대로 유토피아(Utopia)가 아니라 디스토피아(Distopia)라는 쓰레기 더미로 지구를 황폐화시키고 만 것이다.



물론 앞으로 과학기술은 엄청난 발달을 하게 될 것이고,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 등의 문제들을 점진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적인 전망을 하는 과학자들도 있다. 그리고 그들 말대로 된다면 참 좋겠다.



그러나 최근에 가속화되고 있는 천문학적 충격과 재난을 안겨주는 자연 재해들을 생각해 본다면, 그만한 수준에 도달하기 전에 우리의 생존권은 뿌리 채 뽑혀 태워지지 않을까 심히 우려된다.



왜 그런 문제가 생겨난 것일까? 그것은 ‘물질적 야만주의’라는 병에 걸렸던 까닭이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아담 커플이 걸렸던 ‘보암직, 먹음직, 탐스러움’이라는 그 병 말이다. 그리고 아담 커플에게 닥친 통한의 결과가 이제는 약삭빠른 듯 보이는 현대인들의 목을 다시 죄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결국 과학기술이라는 환상적인 이데올로기에 포로가 된 현대인들은 ‘발전 강박증’에 감염되어 자기를 살육하는 살인자가 되고 만 것이다.



프랑스의 르네 게농은 과학기술의 발전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학자이다. 그는 과연 ‘과학이나 기술의 발전이 개인의 척도라든가 문명화된 성취의 측정 잣대가 될 수 있겠느냐’고 의문을 제기한 학자이다. 르네 게농은 “유럽인들의 과학 맹신주의는 내면세계의 천박함과 사상적 미숙함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잠간 조금 빗나간 이야기를 하나 하자. 로마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 20미터 높이의 천장에는 천재 화가 미켈란젤로가 심혈을 기울여 그린 길이 41.2미터, 너비 13.2미터의 ‘천지 창조’라는 그림이 있다. 척추가 휘어지고 목 디스크에 근육마비까지 겪으면서 그 그림에 심혈을 쏟아 완성하였다. 미켈란젤로가 그 그림을 통해 던져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림에서 첫 사람 아담은 땅 위에 편안하게 비스듬히 누워 하늘에 있는 창조주와 마주 보며 창조주의 손가락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다. 이른바 창조주와의 교감이 잘 이루어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비록 의복 하나 입지 않았고 문명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세상이지만 아담에게 불편하거나 불행함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미켈란젤로는 천지창조라는 그림을 통해 진정한 웰빙의 의미를 던지고자 했던 것이다. 진정한 웰빙은 창조주를 기억하고 창조주와 가까워지는 것임을 미켈란젤로는 알았기 때문이다.







**원문보기 www.newsmission.com/news/2011/04/19/1899.4022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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