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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북스]근대 일본은 어떻게 '帝國의 엘리트'를 키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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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7-11-27 00:00 조회77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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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학자가 쓴 제국대 역사 "근대화·산업화 수요 부응 개발도상국형 대학"
歐美의 최첨단 지식 갖춘 전문 인력 양성이 목표… 입학門 좁아 재수생 속출
경성·타이베이帝大 관련 서술 소략한 점 아쉬워

제국대학

제국대학|아마노 이쿠오 지음|박광현·정종현 옮김
산처럼|312쪽|1만8000원


"1877년 발족한 '도쿄대학'이 '제국대학'으로 명칭이 변경된 것은 1886년의 일이다. 왜 '제국'대학이었을까?"

교육사회학 전공자로 도쿄대 명예교수인 저자는 이런 질문으로 책을 시작한다. 1886년 제정된 '제국대학령' 제1조에 그 답이 있다. "국가의 수요에 부응하여 학술기예를 교수하고 그 온오(蘊奧·이치가 깊고 오묘함)를 공구(攻究)함을 목적으로 한다."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 근대화·산업화를 서두르는 '국가의 수요'에 부응하는 대학, 달리 말하자면 개발도상국형 대학, 그것이 제국대학이었다.

도쿄에 하나뿐이었던 제국대학은 1939년까지 설립 순으로 교토·도호쿠·규슈·홋카이도·오사카·나고야 등 7개로 확장된다. 일본 사회 전반에 민주주의·자유주의 물결을 불러일으킨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일환으로 1918년 '대학령'이 공포될 때까지 제국대학 이외의 대학은 설립이 허용되지 않았다.

제국대학은 새 시대를 위한 새로운 엘리트 양성 기관이었다. 탈아입구(脫亞入歐)를 기치로 삼은 일본은 구미의 최첨단 지식을 갖춘 전문 인력을 필요로 했다. '학생'이라는 칭호는 영광이자 명예였다. 이 시대 법규상 고등학교나 전문학교 소속은 '생도'였고, 대학생만이 '학생'이라 불렸다. 1918년 전까지 게이오·와세다 등 사학(私學)은 '대학'이라 칭하는 걸 허락받았지만 제도상 전문학교였다. '학사'라는 칭호도 제국대 졸업자에게만 인정되었다. 딸 가진 부모들 사이에서 '학사님에게라면 시집보낼까'라는 유행어가 돌 정도로 제국대 졸업생들의 위상은 높았다.

'햇병아리 엘리트'였지만 현대와 비교하면 '중닭'이었다. '인생 50년'이라고 일컬어지던 시대였으나 1900년대 초 제국대 졸업생 평균연령은 30세에 가까웠다. 당시 일본의 소학교~고등학교 기간이 14년이었고 중학교 때부터 엄격한 낙제 제도가 적용된 데다 고등학교 입시에서도 재수·삼수생이 속출했기 때문이다. 1894년까지 고등중학교라고 불린 당시 고등학교는 제국대학 예과로서 기능했다. 영어·불어·독어 등 외국어를 비롯한 고도의 기초학력을 갖추려면 중등교육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서다.

도쿄대학의 출입구 중 하나이자 상징이기도 한 ‘아카몬(赤門)’. 일본 제국대학의 역사는 1886년 도쿄대학이 ‘제국대학’으로 개칭되면서 시작되었다가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후인 1947년 막을 내렸다.게티이미지코리아도쿄대학의 출입구 중 하나이자 상징이기도 한 ‘아카몬(赤門)’. 일본 제국대학의 역사는 1886년 도쿄대학이 ‘제국대학’으로 개칭되면서 시작되었다가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후인 1947년 막을 내렸다./게티이미지코리아

1918년 '신(新)고등학교령' 공포 전까지 관립 고등중학교에 입학하고 낙제 없이 졸업한다면 제국대학 진학이 자동적으로 보장되었다. 이후 고등학교 교육목적이 '대학 예비교육'에서 '교양교육'으로 바뀌면서 코넌 도일·마크 트웨인·러셀 등 인문학 책이 교과서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제국대학 예과라는 실체는 변하지 않았다. 입시지옥의 결과 '백선낭인(白線浪人)'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백선'은 당시 고등학교 제모의 흰색 선. '백선낭인'이란 곧 대입 재수생이었다.

책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부분은 간략하게나마 언급되어 있는 경성제국대학에 대한 서술이다. 저자는 일제 식민지였던 경성과 타이베이에 설립된 두 제국대학을 내지(內地) 일곱 형제의 '두 자매'라고 정의한다. "일본 정부가 식민지의 고등교육 진흥에 노력하지 않았던 것은 틀림없다"고 인정하면서 경성제대의 설립 배경을 두 가지로 설명한다. 하나는 미국을 비롯한 외국에서 "일본은 조선 통치를 행하면서 어떠한 문화적 시설도 만들지 않는다"고 비난한 것. 또 다른 하나는 1920년 일본 지식인들이 "식민지 사람들로 하여금 융화를 도모하기 위해서라도 대학을 설립해야 한다"는 건백서(建白書)를 조선총독부에 제출한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총독부는 1924년 2년제 대학예과를 개설하고, 1926년 법문학부와 의학부의 2개 학부로 구성된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한다. 저자는 경성과 타이베이의 두 제국대학이 결국은 식민지 거주 일본인을 위한 대학이었다고 결론 내린다. 1942년 경성제국대학 입학자 182명 중 60%가 일본인이다.

구성이 탄탄하고 가독성이 높다는 것이 이 책의 미덕. 그러나 문고판이라는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결여돼 있다는 점이 아쉽다. 경성·타이베이 제국대학에 대한 서술이 소략한 것도 그렇다. 서울대에서 펴낸 '식민권력과 근대지식:경성제국대학연구'(2011)에 따르면 대학 당국은 학부 학생의 90% 정도를 차지하게 될 예과 합격자에서 조선인 비율이 50%를 넘지 않도록 하는 불문율을 고수하고 있었으며 , 입학시험 자체가 조선인에게 불리했다. 또한 비예과 출신 학부생은 대부분 일본 본토 고등학교 출신이었다. 식민지 조선에 경성제대와 부속 예과 이외에 비예과자 자격 조건이 될 만한 고등교육기관 설립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내 학계에선 3·1 운동 이후 일어난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경성제대 설립의 주요 배경으로 짚고 있다는 사실도 이 책엔 빠져 있다.

곽아람 기자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11/23/201711230226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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