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혁명가 로자, 사랑도 불꽃 같았던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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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를 알고 보는 영화나 드라마만큼 의미 없는 오락도 드물다. 하지만 모두가 다 아는 그 줄거리를 성(性)과 속(俗)을 통해 새로운 재미로 풀어낸다면? 영국 만화가 케이트 에번스가 쓴 ‘레드 로자’는 마르스크주의 사상가 로자 룩셈부르크의 일대기를 대상으로 이런 시도를 한 그래픽노블이다.
마르크스 이후 최고의 좌파 이론가로 ‘붉은 로자’로 불렸던 룩셈부르크는 엉덩이 선천성 관절염으로 평생 절뚝거리면서 걸었다. 이야기는 1871년 폴란드의 유복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난 로자가 이유를 알 수 없는 관절염으로 두 다리에 석고 붕대를 감고 있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뛰어난 두뇌로 10세 때 이미 “지배국의 언어인 러시아어, 조국 언어인 폴란드어, 종교의 언어인 히브리어, 거기에다 독일어까지 말하고 쓰게”된 로자는, 또한 명석하게도 자신의 한계를 사유의 계기로 삼았다. 불편한 몸과 여성이란 핸디캡은 권력욕으로부터 벗어나 사회적으로 핍박 받는 계층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계기가, 폴란드 유대인이란 출신은 민족주의에 연연하지 않는 국제주의자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된다. 제정 러시아에 항거하는 반정부운동에 일찌감치 가담해 고교 졸업 무렵부터 수배 대상이 된 로자는 스위스 취리히로 망명, 대학에서 경제학과 법학을 공부해 박사학위를 딴다.
닳고 닳은 20세기 평전을 21세기에도 읽을 만한 그래픽노블로 바꾸는 키워드는 태초 이래 인류의 화두인 성(性)이다. ‘레드 로자’에서는 평생의 연인이자 동지인 레오 요기헤스를 비롯해 사회주의 ‘절친’ 클라라 체트킨의 아들 코스티아 체트킨, 로자 사후 독일 공산당 당수가 된 파울 리바이까지 연애사를 통해 로자의 사상과 시대상은 물론 인간적 면모까지 그려낸다.
“자기, 내가 당신 목에 양팔을 감고 키스를 해, 천 번은 했을 거야. 난 당신이 날 안아 올려 데려가 주면 좋겠는데.” “당신과 함께 있으면서 삶에 대한 내 시선이 더 성숙해졌고, 그래서 당신에게 이런 말도 들려줄 수 있네. 이제 당신은 새처럼 자유로워졌어. 행복하게 지내.” “자기야, 이거 대단하지 않아? 장교단과 하사관에 대한 모독이라며 폰 팔켄하인 전쟁장관이 고소했어.”
로자가 세 명의 연인에게 보낸 실제 편지 내용을 토대로 그린 ‘19금 베갯머리 송사’ 장면은 그녀가 애초부터 완벽했던 전인격체가 아니라 성숙해가는 인간이었음을,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했던 여성이었음을 묘사하고 있다. 그녀는 독일 사회민주당(SPD)과 독립사회민주당(USPD)의 탁월한 이론가였으나 사민당의 1차 세계대전 지지와 개량주의에 반발, 1914년 칼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독일 공산당(KPD)의 전신인 스파르타쿠스단을 창설했다. 그러나 1919년 혁명이 실패하면서 수백 명의 동료들과 함께 고문당한 뒤 살해돼 리프크네히트와 나란히 묘지에 묻혔다.
작가는 격동의 20세기에 당도한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로자의 탁월한 마르크스 해석, 러시아와 독일 혁명 최전선에서 펼쳐지는 로자의 드라마틱한 삶을 모자이크처럼 엮으며, 때로 직접 등장해 “오늘날에도 이게 해당하는 얘기”냐고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각 장면에 소개된 그의 이론들과 저술을 책 끝머리에 알기 쉽게 풀어 덧붙였다. “내일이면 혁명이 또다시 일어나 치켜든 무기를 쟁강거릴 것이다. 그리고 찬란한 승리를 선포할 것이다. 나는 있었고, 있으며, 있을 것이다.” 로자의 삶, 그 자체가 혁명이었다. 이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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