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보다, 읽다]니푸르에서 뉴욕까지…지도로 본 도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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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푸르 지도. 산처럼 제공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성스러운 도시 니푸르를 그린 이 지도는 관개용 운하의 건설로 이 도시가 다시 힘을 얻게 된 카시트 왕조 시대의 것이다. 현재 이라크 지역인 유프라테스 강 연안에 있었던 니푸르는 수메르의 신전(판테온)에서 가장 존경받는 엔릴 신을 신봉하는 중심지였다. 이 도시가 엔릴 신에게 바친 첫 사원은 기원전 2100년경 우르 도시국가의 지배자를 위해 건설됐다. 왼쪽의 두 평행선은 유프라테스 강을 나타낸다. 그로부터 거의 수직 방향으로 뻗어 나온 운하 하나가 도시를 고리 모양으로 감아 돌면서 상부와 하부로 지도 조각을 양분한다. 해자 하나와 니푸르의 도시 성벽이 상부에서 강과 운하에 평행하게 지나가는 동시에 하부와는 교차되어 펼쳐진다. 성벽에 간간이 설치되어 있는 여섯 개가 넘는 성문에는 일련의 설형문자로 된 이름이 실려 있다. 남서쪽 사분면(하부 왼쪽)에는 공원이 하나 있는데, 그 오른쪽에 에쿠르라고 알려진 엔릴 신과 관련된 지구라트 대사원이 있다. 운하의 다른 쪽에는 에키우르 신전이 있는데, 이는 풍요의 여신인 이난나(또는 이시타르)와 관련되어 있다. 사원들은 이 도시의 중요한 시설이었다. 니푸르에는 기원전 5000년경에 처음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래로, 기원후 800년경까지 사람이 떠나지 않았다. 이 무렵 이곳은 기독교의 주교좌였는데, 엔릴 신이 사라진 후로도 오랫동안 줄곧 종교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캐세이의 세부 지도, 프라 마우로의 마파 문디에서, 1448~1453년
캐세이의 세부 지도. 산처럼 제공
“프라 마우로는 베네치아 인근의 무라노 섬에 있는 산미켈레 수도원의 수도승이었다. 1450년대에 그는 아마도 가장 최초의 세계지도를 만든 것 같다. 그는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의 위임을 받아 이 지도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고전적인 자료들의 권위에 기대기보다는 포르투갈의 해도와 여행자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참고하면서 과학적인 방법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의 지도는 투영법을 사용한 수학적인 지도라기보다는 설명에 치중한 지도였다. 프라 마우로는 그림에 강조점을 두었다. 그리고 그는 동양의 지식과 관련된 자료를 확보하기 쉬운 베네치아에 있었다. 동아시아에 대한 지식은 분명히 마르코 폴로에게 얻었을 것이다. 카탈루냐 지도집도 마르코 폴로의 정보에 의존했다. 캐세이는 카타이(북중국)에 부여된 영국식 이름이었다. 지도에 나타나는 캐세이의 모습은 전통적인 유럽 양식의 이미지를 활용한 것이다(북쪽이 아래쪽에 있기는 하다). 베네치아에 있는 도제(Doge. 총독)의 궁전에는 마르코 폴로의 여행을 묘사한 벽화가 있었는데, 이것이 마우로에게 시각 자료로 제공됐을 가능성이 있다. 이 벽화는 뒤에 화재로 파괴됐다.”
■테노치티틀란 지도, <멘도사 수사본(手寫本)>에서, 1541년
I데노치티틀란 지도. 산처럼 제공
“틀라쿠일로라고 불렸던 원주민 제작자들이 만든 이 지도는 테노치티틀란의 건설을 묘사하고 있다. 그림으로 정확하게 묘사한다기보다는 추상적인 지도로서 도시 건설의 역사와 도시의 구획을 기호로 말해준다. 이는 공간 활용에 치중한 당시 유럽의 지도와 대조적이다. 이 지도는 태양을 상징하는 독수리가 중심에 있다. 돌 위에 자라는 프리클리페어 선인장 위에 독수리가 앉아 있는데 이는 도시의 창건 신화를 말해준다. 독수리는 후이칠로포치틀리, 즉 전쟁의 신이자 아즈텍인들의 수호신과 연관되어 있다. 이 신은 지도자들에게 이 표식을 찾아 그곳에 정착하라고 말해주었던 것이다. 짙은 색 피부의 지도자(선인장의 왼쪽)는 최고위 사제이고, 말풍선 하나를 가진 유일한 남성이다. 석상 아래로 화살 여러 개와 방패 하나가 있는데 이것들은 전쟁을 의미한다. 방패의 디자인은 테노치티틀란을 의미한다. 대각선의 십자가는 두 개의 수로로 4등분된 섬을 묘사하는 양식화된 기획이다. 사분면들은 이 도시의 사회 조직을 네 구역으로 묘사한다. 상부의 구조는 주(主) 신전(Templo Mayor)의 소박했던 처음 모습일지 모른다. 해골 걸이는 희생 의례가 이루어졌음을 입증한다.”
■1481년의 제노바 지도, 크리스토포로 데 그라시 제작
1481년의 제노바 지도. 산처럼 제공
“1597년 화가이자 조각가인 데 그라시는 오늘날에는 전하지 않는 그림으로부터 이것을 복제했다. 이 그림은 교황 식스투스 4세의 부름에 응해 오스만제국으로부터 오트란토를 해방시키기 위해 출항하는 함대들을 기념하는 것이다. 원형의 둔덕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모습을 원근법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바다에서 제노바를 바라보는 시점은 고전적인 이미지가 됐다. 이 독립적인 해양 공화국은 해상 무역에 의존하고 있었다. 오스만제국의 팽창(특히 콘스탄티노플 함락)과 베네치아의 흥기로 말미암아 제노바는 도시의 운명에 영향을 받을 만큼 충격을 받았다. 별다른 특징이 없는 건물들이 선창가의 활동에 가까이 가려고 안간힘을 쓰는 듯 빽빽이 채워진 모습으로 제노바를 묘사했다. 두 곳의 방파제가 이 도시의 유명한 등대와 함께 뚜렷이 보인다. 항구의 중심(그리고 그림의 중심)에 무기고가 있다. 무기고에서 동쪽으로 바라다보면 부잔교(浮棧橋)들이 있다. 그 너머로 산로렌초 대성당의 흑백 줄무늬가 있는 탑 가까이에 두칼레 궁전이 있다. 이 도시의 육상 방어는 리기 언덕에 있는 성채들이 담당했는데, 마치 제노바를 보호하는 듯 감싸 안은 모습이다. 이러한 입지는 바다를 내다보는 데도 유리해서, 알제 등지에서 오는 해적의 습격을 조기에 경보하는 역할을 했다.”
■빈의 원형 지도, 한스 제발트 베함 제작, 1530년
빈의 원형지도. 산처럼 제공
“1529년 오스만제국이 점령한 직후에 뉘른베르크에서 니클라스 멜데만이 발행한 이 목판본 지도에는 옛 빈의 지형이 잘 드러나 있다. 이 지도는 슈테판 대성당에서 스케치했는데 당시 독일 용병으로 방어 사령관이었던 니클라스 폰 살름의 사령부가 있던 중심지로부터 도출된 원형의 디자인이 눈에 띈다. 주변의 교외에는 쉴레이만 1세의 군대가 도시를 포위하고 있다. 이 도시의 300년 된 성벽은 내부의 모습이 잘 드러나서 방어군 쪽의 군사력이 잘 묘사될 수 있도록 간략화됐다. 살름은 도시의 성문을 막고 토루와 성벽을 보강하면서 격렬하게 방어했다. 또한 빈을 위해 필요하다고 여겨질 경우 어떤 건물도 헐어냈다. 공격을 버텨낸 뒤 빈은 야심찬 계획으로 도시를 둘러싸는 대규모의 성을 축조했다. 그러나 오스만제국의 군대가 1683년에 다시 돌아와 이 성은 결국 시험에 들었다.”
■네덜란드의 17개 주 지도, 요하네스 판 두테큄 제작, 1648년
네덜란드의 17개 주 지도. 산처럼 제공
“클라에스 얀스 비셔가 앞서 1610년경 제작한 ‘벨기카의 사자(Leo Belgicus. 벨기에, 네덜란드 등의 저지대 국가들을 사자로 형상화한 지도 ― 옮긴이)’라고 불리는 동판화 지도에 바탕을 두고 있는 지도다. 이 지도는 네덜란드 독립전쟁(80년 전쟁) 중 휴전했던 12년 동안에 유행한 모티프를 활용했다. 스페인의 지배에 항거하여 네덜란드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것이었다. 도시의 자부심에 강한 뿌리를 둔 네덜란드의 정체성과 새로운 통합을 위한 열망이 포효하는 사자 모습(네덜란드를 구성한 17개 주의 윤곽에서 도출됨)의 지도에 잘 드러나 있다. 네덜란드 북부와 남부의 위대한 상업도시들은 많은 이들에게 이 나라 정체성의 핵심이었다. 이견이 있을 수는 있지만 암스테르담 항구가 그 중심에 있었다.”
■에도(도쿄) 지도, 엥겔베르트 캠퍼 제작, 1690년경
에도 지도. 산처럼 제공
“도쿠가와 막부(1603~1867) 치하의 에도는 1590년 무렵에는 강 하구의 습지에 있는 어촌이었으나, 1650년쯤에는 이 나라의 수도가 됐다. 1657년의 대화재(메이레키 대화재明曆の大火)로 큰 피해를 입어 도시의 3분의 2가 파괴됐다. 캠퍼의 <일본의 역사>에 실린 이 지도의 중앙부(북쪽이 위쪽)에는 해자를 두른 에도 성이 보인다. 바로 이곳에 나가사키 교역 기지의 네덜란드 사절들이 4년마다 쇼군에게 공물을 바치러 왔다. ‘몬(紋)’이라고 불리는, 유명한 가문의 문장(紋章)들이 가장자리에 있다. 그 지도자들은 격년으로 에도를 예방해야 했고(참근교대參勤交代), 그들의 부인과 아이들은 충성을 표시하기 위해 인질로 영구히 에도에 살았다.”
■파리 지도와 파리의 주요 건물들 그림, 자크 에스노와 미셸 라필리 제작, 1789년
파리 지도와 건물. 산처럼 제공
“1784년 M. 피숑이 처음 발간한 이 지도는 여러 차례의 중요한 개정을 거치게 되는데, 그 최종본은 1802년에 나왔다. 지도 발행인 난에는 센 강의 님프와 파리의 알레고리가, 예술과 과학의 상징과 함께 장식되어 있다. 동판본으로 섬세하게 제작된 이 지도는 혁명 직전의 파리를 보여준다. 센 강으로 양분된 파리가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지도의 가장자리에는 인덱스를 배치해서 중요한 거리, 교구(敎區), 대학, 병원, 건물, 광장 그리고 흥미를 끄는 곳을 식별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지도의 가로축과 세로축에 문자와 숫자를 기재해서 그 조합으로 위치를 찾을 수 있게 했다. 지도의 가장자리에는 파리와 베르사유 궁전의 주요 건물들 그림을 실었다. 1792년 8월 튀일리 궁전(하단 중앙)은혁명가들의 습격을 받았고, 이어서 공화국이 선포됐다.”
■뉴욕의 센트럴파크 개발 지도, 행정관위원회 제작, 1867년
뉴욕 센트럴파크 개발 지도. 산처럼 제공
“1800년대 이전에는 공유지가 뉴욕 맨해튼의 북쪽 지역과 인근 할렘 지역을 분리시켰다. 독립 이후, 시 당국은 대지를 측량하고 매각했다. 1815년까지는 토지의 대부분을 1660년대에 이 지역(예컨대 월드론)에 정착한 가문이 소유했었다. 당시 측량하면서 계획된 도로들은 5번 애비뉴와 6번 애비뉴가 될 예정이었다. 1850년대에는 뉴욕에 모두를 위한 ‘도시의 허파’ 역할을 할 대규모 공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수년의 논쟁 끝에 1854년 중심 입지가 선정됐다. 이 공원은 맨해튼의 지형뿐만 아니라 이 도시의 사회적 경관도 바꾸었다. 돌투성이의 습지에 살던 사람들은 이주 당했고, 어퍼이스트사이드 지역이 부촌의 모습을 갖추어가기 시작했다. 프레더릭로 옴스테드와 캘버트 복스가 제출한 자연주의적 ‘그린스워드 플랜(Greensward Plan)’이 디자인 공모를 통해 선정됐다. 두 사람은 이 도시의 여러 계층이 섞일 수 있는 민주적인 공간을 열망했다. 1858년에 시작되어 1860년대 중반쯤에 3.4제곱킬로미터 규모로 완공된 센트럴파크에는 오솔길과 산책로, 숲과 호수, 다리와 건축물, 시골스러운 모습(바위에서 각각의 나무까지)이 마련됐다. 뿐만 아니라 크로톤 상수도 시설(1842~1877)을 대체할 저수 시설(1993년까지)도 있었다. 오늘날 이 자리에 뉴욕공공도서관이 들어서 있다.”
■1865년과 1884년의 뉴욕 지도
“조감도는 남쪽에서부터 비슷한 관점으로 뉴욕 시와 브루클린을 묘사하고 있다. 배터리 파크가 앞쪽에 있고, 저지(Jersey) 해안이 왼쪽 상단에 있으며, 윌리엄스버그(브루클린)가 오른쪽 하단에 있는 점도 같다. … 1884년의 것(위쪽)은 커리어 앤드 아이브스 회사가 그린 것이다. 뉴욕에서 이름난, 적갈색 사암(브라운 스톤)으로 지은 주택들이 1865년에 이미 분명하게 보인다. 눈에 띄게 두드러진 모습은 바로 1883년에 개통된 브루클린 다리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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