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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이한수의 매거진 레터]세 천재의 엇갈린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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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7-06-19 00:00 조회1,06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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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괴산 '홍범식 고택'에서 세 천재(天才)의 삶을 떠올렸습니다. 홍명희·최남선·이광수입니다. 나이는 1888년생 홍명희가 가장 많고 각각 두 살씩 차이납니다. 세 사람은 1906년 무렵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으로 만났습니다. 전통 시대라면 동등하게 우정을 나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서로 신분이 달랐으니까요. 홍명희는 고관대작 명문가 자제, 최남선은 약재 유통으로 돈을 번 중인 집안, 이광수는 어릴 때 부모를 잃은 고아 출신 평민입니다.

세 사람은 당대에 '동경삼재(東京三才)'라 불렸습니다. 도쿄 유학생 중 뛰어난 세 사람이란 뜻입니다. 이들의 삶을 추적한 '동경삼재'(류시현 지음), '이광수, 일본을 만나다'(하타노 세츠코 지음)를 지난 주말 읽었습니다.

셋 모두 민족 정신이 투철했습니다. 최남선은 기미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출판 활동 등을 통해 '조선심(朝鮮心)'을 고취했습니다. 이광수는 유학생이 중심이 된 2·8독립선언서를 쓰고 상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을 냈습니다. 홍명희는 괴산 만세 시위를 주도하고 좌우 합작 민족운동 단체인 신간회 핵심 인사로 활동했습니다.

1936년 무렵 세 사람은 다른 길을 갑니다. 일제 탄압이 극심해지던 때입니다. 최남선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가 되었고, 이광수는 전향 선언을 했습니다. 나중엔 조선인 청년에게 전쟁터에 나가라고 독려했습니다. 반면 홍명희는 끝까지 지조를 지킵니다. 모든 공적인 생활을 접고 은둔한 것이지요.

홍명희는 아마도 아버지 유언을 되새겼을 터입니다. 아버지 홍범식(1871~1910)은 일제가 한국을 강제병합한 1910년 8월 29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잡기엔 내 힘이 무력하기 그지없고 망국노(亡國奴)의 수치와 설움을 감추려니 비분을 금할 수 없어 순국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구나." 그는 아들에게 남긴 유서에서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빼앗긴 나라를 기어이 되찾아야 한다"고 썼습니다.

'홍범식 고택' 툇마루에 오래 앉아 아버지와 아들의 삶을 생각하다가 절로 고개를 숙였습니다.


이한수 주말매거진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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