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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한국 ‘반미주의’ 기원과 ‘양키 고 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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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7-03-17 00:00 조회87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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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동의 독서무한
“헤겔은 어딘선가 세계사에서 막대한 중요성을 지닌 모든 사건과 인물들은 반복된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은 소극(笑劇)으로 끝난다는 사실 말이다.”

박근혜 정권 몰락을 지켜보면서, 2013년 6월에 썼던 기사에 끌어다 썼던 인용문을 떠올렸다. 그때도 국정원 대선개입과 북방한계선(NLL) 관련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 공개 논란 속에 국정원과 집권당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어버이연합’ 등이 ‘종북좌파’라는 흉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때도 성조기를 흔들었던가.

헤겔 인용은, 카를 마르크스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1848년 혁명으로 들어선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황제가 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조카 루이 보나파르트(나폴레옹 3세)의 1851년 12월 쿠데타를 두고 한 얘기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799년 11월 9일(프랑스 혁명력으로 ‘안개의 달’인 브뤼메르 18일)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총재정부를 무너뜨리고 황제가 됐다. 50여년 뒤 프랑스혁명을 끝장낸 삼촌의 쿠데타를 그대로 흉내 내 황제가 된 조카의 쿠데타를 두고 마르크스는 그렇게 야유했다. 루이 보나파르트는 결국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뒤 포로가 되고 1871년의 제3공화정 수립과 함께 폐위당했는데, 이를 소극이라 해도 될지. 그는 프랑스 역사상 마지막 세습군주였다. 이 땅에서도 다시는 반동적 ‘유신 회귀’ 시도가 없기를.

2015년 2월 김동춘 교수와의 인터뷰 때, 박근혜 정권의 역사적 역할은 ‘박정희 신화’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질문을 했는데, 실현(?)된 것인가. 쿠데타로 집권한 아버지와 ‘유신체제로의 회귀’를 꿈꾼 딸, 그 두 절대 권력자의 몰락은 실로 한 번은 비극적으로 또 한 번은 소극(웃음거리)적으로 끝났다고 할 수 있을까.

1999~2002년에 주한 미국대사관 정치과장이었고, 2002~2004년엔 미 국무부 한국과장을 지낸 데이비드 스트라우브의 <반미주의로 보는 한국 현대사>(산처럼)를 읽으면서 반핵사태를 생각했다.

스트라우브는 자신의 대사관 정치과장 재임 기간에 일어난 노근리 학살 보도, 베트남 한국군의 미군 살포 제초제 에이전트 오렌지 피해 소송, 미군의 포름알데히드 한강 방류, 매향리 사건, 주둔군지위협정 개정 협상, 동계올림픽 ‘오노의 할리우드 액션’, 신효순·심미선 사건 등으로 촉발된 한국 내의 거센 ‘반미주의’를 되짚어보면서, 그 주요 원인을 한국인들의 몰이해와 무지, 편견, 언론 오보, 정치적 의도 탓으로 돌렸다. 주로 미국 독자를 겨냥한 그 책에서 그가 한 지적과 비판은 대체로 냉철하고 합리적이며, 상당 부분 경청할 만했다.

하지만 온건하고 합리적으로 보이는 그의 지적들이 한편으로는 식민국 또는 종속국을 바라보는 온정적 엘리트 제국 경영자·관리들의 전형적인 시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친미국가 일본을 ‘70년간 전쟁을 하지 않은 평화국가’로만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가쓰라-테프트 밀약’에 대한 한국쪽 언설도 부당한 오해 내지 무지의 소산으로 비치고, 한국 현대사 비극의 출발점인 미국의 일방적인 한반도 분단도 미국보다는 한반도 내 좌우익 분열 쪽에 더 큰 책임이 있는 것으로 치부되는 듯하다.

무엇보다 타국에 대한 강대국 미국의 개입, 친일세력 지원과 자주독립세력의 조직적 파괴가 부른 파행과 비극, 분단체제 영속화, 그것을 토대로 형성된 한-미 기득권세력의 압도적이고 폭력적인 담합에 대한 반성적 사고가 결여돼 있다. 한국에 ‘반미주의’가 존재한다면, 그게 그 출발점인데도.

햇볕정책이나 일본·중국·북한을 바라보는 스트라우브의 시선은, 그 기술적 측면들에 대한 ‘건설적’ 지적들은 평가할 만하지만, 대체로 한국 내 친미 기득권세력의 가치관·세계관과 대차 없어보인다. 탄핵의 직접적 이유는 아니지만 반박 정서를 증폭시킨 한-미의 사드 배치 강행이나 한-중관계 파탄, 남북대치 격화와 미국의 한-일 군사협력 압박 등 심각한 외교·안보 현안들에 대한 박근혜 정권의 무능과 무대책의 뿌리는 무엇일까. 탄핵반대·친박 태극기 시위대가 성조기를 흔들어댄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그 뒤틀리고 뿌리 깊은 연원을 제대로 성찰하지 못한다면, 언젠가 “양키 고 홈!”이 터져나올 것이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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