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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제국의 신민으로 길들이려던 '경성 프로젝트'는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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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01-22 00:00 조회5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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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연구하는 美 소장 학자
日 지배 당시 서울의 변화 양상, 사람들의 반응 구체적으로 담아

"조선신궁 방문한 식민지 주민들, 관광 명소 찾은 것처럼 행동해"


'서울, 권력 도시'


서울, 권력 도시|토드 A. 헨리 지음|김백영·정준영·이향아·이연경 옮김|산처럼|484쪽|2만8000원

미국 캘리포니아대학-샌디에이고(UCSD) 역사학과 교수인 저자 토드 헨리(48)는 한국을 연구하는 미국인 학자다. 그는 "한국학자들 중 '서림파(Westwood faction)'의 일원이라고 말할 수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서문에서 밝혔다. 저자는 서양의 한국학자인 '서림파' 중에서도 1945년 이전 시기 한국을 주로 연구하는 학자로서 에드워드 와그너·제임스 팔레·마르티나 도이힐러 등 1세대, 카터 에커트·도널드 베이커·마크 피터슨·존 덩컨 등 2세대를 잇는 3세대 소장 학자에 속한다.

'서림파' 학자들은 한국인 연구자에서 쉽게 보이는 민족주의 성향에 치우치지 않고, 일제시대를 바라볼 때 근대와 수탈, 친일과 반일이란 이분법을 넘어선다. 저자도 선험적 이분법을 넘어 일본 식민 지배 시기 서울의 공공 공간이 어떻게 변화하고, 당대 사람들은 이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구체적 양상을 살핀다. 조선왕조 500년 수도이자 대한제국의 황성(皇城)인 한양을 식민지 수도 게이조(경성·京城)로 바꾸려는 일제의 기획은 조선인을 일본 제국의 신민으로 만드는 '동화 정책'의 핵심이었다.

1925년 남산에 건립된 조선신궁은 천황가에 '정신적 동화'를 하도록 설계한 시설이었다. 경성에 사는 일본인처럼 조선인도 천황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참배하도록 강요받았다. 그러나 동화는 결국 실패했다. 식민지 주민들은 조선신궁을 방문했지만 경건한 참배가 아니라 관광 명소를 찾은 것처럼 행동했다. 신토(神道)를 지지했던 일본인 오가사와라 쇼조는 "신궁 앞에까지 가면 일본인들은 모자를 벗고 머리를 조아리는 반면, 조선인들은 휙 돌아서서 집으로 돌아가버린다"면서 "조선인들은 참배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참관하고 있을 뿐이었다"고 회고했다.

이미지 크게보기서울 경복궁 광화문 뒤편으로 건설 중인 조선총독부 건물이 보인다. 1926년 무렵 사진이다. 일제는 1916년부터 근정문 앞에 있던 흥례문과 영제교 등을 헐고 그 자리에 총독부 건물을 지었다. /국사편찬위원회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전시 체제로 바뀐 1937년 이후 참배 강요는 더 폭력적이고 강압적이 되었으나 조선인의 내면을 지배할 수는 없었다. 한 기독교 목사는 신학생들과 함께 단체로 신궁을 방문했다. 목사는 외견상 필요한 의식을 모두 수행했지만 이렇게 기도했다. "신께서 하루빨리 일본 귀신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워주시기를. 우리가 하루속히 우리의 독립을 되찾을 수 있기를."

일제가 조선 왕실의 정전(正殿)인 경복궁에 대리석 총독부 건물을 신축하고, 궁궐 다수 전각(殿閣)을 철거한 터에서 대규모 박람회를 연 것은 일본의 통치가 근대적 번영을 가져온다고 선전하려는 '물질적 동화' 과정이었다. 박람회 전시는 식민지 이전 조선의 과거를 척박하고 억압적인 것으로, 일제 식민 통치 이후 조선의 현재를 근대적이고 생산적인 것으로 보여주는 도표와 사진을 전시하면서 일제 지배를 경제적 착취가 아니라 혜택으로 바라보도록 유도했다. 그러나 대부분 동원된 조선인 관람객들은 전시 물품을 보기보다는 놀이 시설이나 쉼터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대공황 시기인 1929년 박람회 비용 마련을 위해 펼친 기금 모집 캠페인은 오히려 식민지 산업이 안고 있는 민족적 차별을 부각하는 결과를 낳았다. 모금을 하던 경성협찬회 일부 회원은 조선인들이 기부할 돈이 없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강압적 모금과 관람에 동원된 조선인들은 조선의 경제와 문화 전통이 전시된 것을 보고 일제 통치에 적개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총독부는 매년 두 차례 경성에서 실시한 대청소와 위생박람회 등을 통해 조선의 생활이 청결해졌다고 주장했다. 저자는 이를 '공중적 동화'라고 부른다. 총독부는 조선인 대중이 이 기획에 잘 반응하리라고 믿었지만, 조선인 다수보다는 소수 일본인 주민의 보건에 특 혜를 주는 기조는 내내 유지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식민지 주민을 2등 국민으로 차별하고 배제하는 체제에서 이들을 '충량한 황국 신민'으로 만든다는 일제의 동화 정책은 결코 이룰 수 없는 프로젝트였다. 저자는 "식민지 근대성이라는 것이 간교한 분할주의적 통치 시스템임을 고스란히 보여준다"고 했다. 원제는 'Assimilating Seoul'(서울 동화하기).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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