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조선왕실 288년간의 현장기록… ‘승정원일기 - 소통의 정치를 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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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1-03-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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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 소통의 정치를 논하다/박홍갑 이근호 최재복/산처럼
박홍갑(국사편찬위원회 편찬연구관), 이근호(국민대학교 출강), 최재복(국사편찬위원회 편찬연구사) 세 명이 공동 저자다. 책머리에 “승정원일기를 한 권의 책으로 낸다는 것이 애초부터 무리라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고 고충을 털어놨다.
승정원일기가 그만큼 방대하다는 반증이다. 국보 제303호이자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승정원일기는 인조 1년인 1623년부터 1910년 8월까지 288년간 왕실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3245권에 빼곡히 담고 있다. 승정원은 지금으로 따지면 대통령실에 해당하는 기구로 왕명의 출납을 담당했다.
승정원일기는 조선왕조실록에 비해 기록기간은 절반이지만 양은 5배가 많다. 그만큼 디테일이 살아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왕도 함부로 열람할 수 없었지만 승정원일기는 필요할 때면 언제나 볼 수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이 시정기나 사초 등을 토대로 편집자가 가공한 2차 자료라면 승정원일기는 당시 상황을 현장에서 기록한 1차 사료다. 가령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가 윤관 장군 묘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왕에게 상소를 올리는 등 대립한 사건이 있었다. 승정원일기는 파평 윤씨 집안 291명이 연명해 올린 상소의 내용과 명단까지 모두 기록하는 반면 조선왕조실록은 상소 내용과 명단이 모두 누락돼 있다.
승정원일기의 개요 설명을 듣고 나니 이 한 권에 뭘 ‘꾹꾹’ 눌러 담았는지 궁금해진다. 먼저 왕의 일상이 소개된다.
“상재(上在)○○궁(宮), 정상참(停常參) 경연(經筵).”
왕은 ○○궁에 있었으며 아침 조회인 상참과 경연을 정지했다는 뜻이다. 승정원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왕은 매일 아침 기상하자마자 의관을 정제하고 왕실 웃어른에게 문안을 드린다. 이후 신하들과 학문토론을 하는 경연, 아침식사, 조회로 이어지는 일정을 소화한다. 위 기록은 왕이 가끔 일정을 생략하기도 했음을 보여준다.
신하들이 왕실에 대한 문안 기사를 올릴 때 왕에게 병이라도 있으면 문안 기사는 약 처방전과 병의 차도를 묻는 내용으로 가득 찬다. 당시 최고의 의술과 처방전이 실리기 때문에 승정원일기는 한의학의 중요한 자료로도 평가받는다. 낮 공부인 주강, 지방관 접견, 각 지방에서 올라온 장계 등을 처리하고 저녁강의인 석강, 밀린 업무 처리 후 웃어른께 문안인사를 드리고 잠자리에 드는 것으로 왕의 하루는 끝났다. 영조 20년인 1744년 3월 4일에는 4경(오전 1∼3시)에야 모든 일이 끝나기도 했다.
왕과 신하 사이에 팽팽한 균형이 있었음도 들여다볼 수 있다. 현종 1년(1660년) 6월 29일자 승정원일기를 보면 이조참의가 올린 관원임명건을 왕이 결재하지 않아 밤늦도록 퇴근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왕이 지명한 사람이 명단에 없었기 때문이다. 나중에야 왕의 의중을 알아채고 새로 결재를 올려 통과했지만 20여 일이 지나 송시열(1607∼89)이 이를 비판하면서 인사안은 원점으로 돌아간다.
당시 시대상을 한 편의 영화처럼 흥미진진하게 관찰할 수 있는 것도 승정원일기의 매력이다. 인구가 늘고 과거시험 대상자가 늘면서 과거도 혼탁해진다. 영조 30년(1754년) 4월 글 잘 하는 사람 네댓 명을 과거시험장에 데리고 들어가서 답안을 작성하다가 발각된 일, 현종 9년(1668년) 12월 활을 대신 쏴줬다가 엄벌에 처해진 일 등이 승정원일기를 통해 전해진다. 지방과 서울의 학력차가 심해 ‘지방에서 수천 명이 응시했지만 백지를 내는 사람이 절반을 넘었다(영조 42년 10월)’는 기록도 있다. 이렇다보니 합격률을 높이기 위해 서울 명문가의 자제가 지방 출신이라고 속여 과거를 치르는 일도 있었다.
김준엽 기자 snoopy@kmib.co.kr
**기사 링크news.kukinews.com/article/view.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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