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희망의 인문학-정재승이 만난 사람들>-주경철 교수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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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이제 우리 시각으로 해석할 때”- 서양사학자 주경철 교수
“우리 저자가 이만한 대작을 쓰는 건 몇 년 후에나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유럽중심주의에서 완벽하게 벗어나 자기만의 시각으로 쓴 전무후무한 저작이다.” 주경철 교수의 <대항해시대>에 대한 한 독자의 평이다. 우리 학계의 한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미디어의 반응도 뜨거웠다. 2008년 각 매체는 <대항해시대>를 ‘올해의 책’으로 꼽으며 주목했다. 주경철 교수는 대중과 소통하는 학자다. 청소년을 위한 <문학으로 역사 읽기, 역사로 문학 읽기>, 역사의 이해를 돕는 대중서 <문명과 바다> <신데렐라 천년의 여행> <테이레시아스의 역사> 등을 통해 왕성한 저작 활동을 펼쳐왔다. 희망의 인문학, 여덟 번째 학자로 초대된 주경철 교수는 솔직담백한 이야기로 독자와의 소통을 시도했다.
주경철 교수는 지독하다. 책 한 권을 내면서 고치고 또 고쳐 쓴다. 역사학은 철저한 사료 확인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또 그런 훈련이 세상을 조직적으로 바라보는 눈을 길러준다고 말한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정재승 두 번째 공개대담입니다. 희망의 인문학 8번째로 만나는 인문학자는 주경철 교수님입니다. 첫 질문은 늘 시의적인, 곤란한 질문으로 시작하는데요. 오늘은 동료 교수이신 안철수 교수님의 출마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쭤볼께요.
▶주경철 의뭉스러운 줄 알았어요. (웃음) 솔직한 답을 원하신다면 출마를 안 하시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해요. 여태까지 해온 측면을 봤을 때 좋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개연성은 보여요. 기존 정치권이 실망을 줬기 때문에 제3의 인물이 나와 무언가 시원한 걸 해줬으면 하는 염원이 있었죠. 그 분이 정치계보다는 학계에서 공헌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싶어요.
▶정재승 서울대의 입장인 것 같아요. (웃음) 어린 시절 또는 젊은 시절을 어떻게 보내셨나요.
▶주경철 수업시간에 이런 질문을 학생들에게 해요. 너의 최초의 기억이 무엇인지 물어보죠.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는데 도움이 되니까요. 아주 어렸을 때 집이 왜 그렇게 똑같이 생겼는지 집을 찾아가지 못했어요. 어쩔 줄 모르는 청년, 이러지도 못하고 저리지도 못한 상태였죠.
▶정재승 모범생으로 보여요. 공부도 잘 했을 것 같구요.
▶주경철 맞아요 (웃음) 그런데 속으로 아픈, 왠지 모를 멜랑콜리가 있었어요. 시키는 건 했죠. 마음속 일탈은 해도 직접 해보지는 않았어요.
예스24와 중앙일보가 함께 하는 희망의 인문학 : 정재승이 만난 사람들 8번째 공개대담(마포구 이리카페)
▶정재승 박사 논문을 쓰다 보면 환희의 순간을 느끼기도 하죠?
▶주경철 네덜란드, 독일 사료들을 보다 보면 역사학이 과학이자 픽션이라고 하잖아요. 어떤 측면에서 픽션이라고 할 수 있어요. 사실, 16세기에 장사한 내용을 어떻게 정확히 잡겠어요? 맞아떨어지면서 그림이 조금씩 잡혀가는 거죠. 픽션이 만들어지려면 여기 자료를 저쪽 가서 찾아보기도 해요. 황당한 방법론이란 생각도 들죠. 그 사료들을 조합하는 과정에서 더 큰 스토리를 만들고, 큰 희열을 느끼죠.
▶정재승 반대되는 증거가 나오거나 안 맞을 때도 있을 것 같아요.
▶주경철 많죠. 폴란드 사람들은 늘 당했다고 하는데, 사실 그렇지만은 않거든요. 그 때는 정직해야죠. 역사란 그리 단순하지 않아요.
▶정재승 한국의 서양사학자들은 어떤 연구를 해야 할까요.
▶주경철 서양사이면서 지구사인 것, 우리에게 서양이란 무엇인가, 근대세계라는 것이라는 게 서구가 주도권을 잡았던 것이 무엇인가겠죠. 나름대로 해석해온 틀이 있는데, 그들이 얘기해온 것에 머무를 필요는 없어요. 자기들 이야기기 때문에 함정에 빠질 수도 있고요. 우리에게도 소중하고, 저쪽 사람들에게도 소개되면 좋을 서구역사의 재해석을 시도해 보면 좋겠다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그걸 포함해, 글로벌한 차원에서 역사가 어떻게 흘러왔는지를 해석해 보는 여지도 열려있죠. 그걸 통해서 세계 역사를 거시적인 측면에서 조망해 볼 수 있습니다. 더 큰 역사, 우리 역사의 특수성을 코멘트할 수 있겠죠. 의미 있는 학문을 할 수 있겠다 싶어요.
▶정재승 우리 역사, 동양사와 대화를 하거나, 협업을 하실 계획은 있으신가요.
▶주경철 뜻은 있으나 활발하지는 않아요. 국가의 재정문제가 중요한데요. 조선과 일본, 중국과 유럽의 재정은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연구해 본 적은 있어요. 그걸 10여년 한 경험도 있어요.
▶정재승 어떠셨어요?
▶주경철 다른 분야를 한 분과 비교를 해보니까 ‘이거다’ 싶긴 해요. ‘다르구나’ ‘같구나’ 싶기도 해요. 협업, 분업이기도 한데, 각자 하고나서 성과를 가지고 논의하는 거지, 함께 나누면서 하지는 않았어요. 당시에는 그랬는데, 요즘은 또 어떨지 모르겠어요.
▶정재승 이번에는 방청석에서 질문을 받기로 해요.
▶주경철 항의, 제안, 충고도 좋습니다.
기업도 정체성을 위해 기업사 연구자들 필요
▶정재승 경제학과를 가셨는데, 어떤 꿈을 가졌나요?
▶주경철 사회대를 갔는데, 2학년 때 과 배정을 받았어요. 많은 학생들이 경제학과를 갔죠. 요즘 학교에서 자유전공학부를 맡고 있는데, ‘마음대로 찾아가라’고 학생들에게 이야기를 해요. 하지만, 그렇지 못한 학생들이 많아요. 부모님의 바람대로 가는 듯해요.
▶정재승 역사는 언제부터 하게 되셨나요.
▶주경철 경제학 점수가 안 좋았어요. 수학을 잘 못했구요. 경제학은 법칙적인데, 그 방식이 잘 안 맞았어요. 저는 사람의 일을 직접 말과 글로 하는 걸 더 잘 했어요. 80년대 초, 좌절하던 시대였잖아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기억이 있어요. 그 때 역사가 해답이 아닐까 생각하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정재승 정운찬 전 총장님의 애제자라는 말이 있던데요.
▶주경철 정운찬 교수님이 사람을 잘 기억해요. 한 학년에 100명의 학생들이 있는데 모두 이름을 기억했어요. 그 당시에 사고를 쳤어요.
▶정재승 어떤 사고를 치셨나요? (웃음)
주경철 시대가 시대니만큼 돌 던지다 경찰서도 갔죠. 처음에는 재적이었다가 무기정학, 결국 징계수위가 제일 낮은 근신으로 낮춰졌어요. 당시, 정 교수님이 학과장이셨으니 기억을 하셨겠죠. 제가 파리 유학 가 있을 때 오셨는데, 딱 알아보시더라구요. 그런데, 그걸 애제자라고 할 수 있나요? (모두 웃음) 경제학을 하다 인문대 역사학과로 옮긴 걸 보고 기특하다고 생각하셨는지도 모르겠어요.
이러지도 저러지는 못한 시대상황, 역사가 해답이 아닐까?
▶정재승 박사 학위 논문은 어떤 주제였나요?
▶주경철 경제사로 출발했는데요. 유럽 내의 국제무역,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동유럽과 서유럽 사의 원재료무역 정도였어요. 유럽이 전 세계로 팽창해 가는데 유럽이 내부적으로 시스템을 만들어 적용한 거라고 주장한 거죠.
▶정재승 박사과정 하실 때 공부의 참맛을 느끼셨나요?
▶주경철 쓴 맛을 느꼈죠. 역사학은 사료가 있어야 하잖아요. 유학할 때 지도교수님이 30개 국어를 하는 분이셨는데, 16세기 독일어 문서를 번역하는 거예요. 네 명으로 시작했는데, 결국 혼자 남았어요. 첫 만남에서 500페이지가 넘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3권을 주고 다음 주에 토론하자고 하더라구요. 한국에서는 사료 읽는 걸 못했는데. 어느 날인가는 다 해독이 안 된 거예요. 사람이 이래서 미치는구나 이런 생각도 했죠. 도서관에서 ‘으아악’ 하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어요. (웃음)
역사학은 과학이자 픽션
▶독자 1 학생인데요. 서양사 연구를 한다면, 어떻게 생계를 유지해야 할지 고민입니다.
▶주경철 ‘산 입에 거미줄 치랴’는 주제로 칼럼을 쓴 적이 있어요. (웃음) 전공을 살려서 직업을 갖는 건 쉽지 않아요. 서양사뿐만 아니라 인문학 대부분이 그렇죠. 대기업에 이런 제안을 하고 싶어요. 오늘의 행정, 내일의 역사. 기록을 남기고 정리하면 기업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거든요. 엄청나게 많은 문서가 있는데, 1차적으로는 비즈니스를 위해서 하지만, 길게는 기업의 역사와 연관이 있으니까 그런 사람이 있어야죠.
기업사 연구하는 친구가 있어요. 나치시대의 폭스바겐을 연구한다 하면, 그 회사에서 안내를 해줘요. 꼭 필요하죠. 그런 종류의 것들이 개발될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좀 요원하긴 하죠. (웃음) 꼭 역사연구자들을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기업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전공을 살리지 않아도 그걸 살려서 출판업이라거나 기자도 있고, 그렇게 생각하면 굶지 않아요. 한 친구는 영국사를 전공했는데, KOICA(한국국제협력단)에 갔어요. 외국원조가 돈으로만 하는 건 아니거든요. 이 사람들에게 어떤 기술이 필요한가, 또 이 지역 사람들이 무엇이 더 필요한지 인문학적 차원의 도움을 줘야 해요. 스스로 정당화를 하고 길을 뚫어야죠.
삶에 묻어있는 흔적에 대한 애정 아쉽다
▶독자 2 문화재와 관련해서 수업을 듣고 있는데, 서양은 문화재 관리를 잘 하고 있는데, 우리는 문화재를 파괴하고 있다고 합니다. 교수님이 보시기에 역사를 보는 눈에서 어떤 차이가 있나요? 문화를 돈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데요.
▶주경철 문화, 역사에 대한 사람들의 자세나 태도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프랑스 사람들의 경우엔 많이 알고 있어요. 단적인 예로 여기 있는 분 중 동대문에 대해 얘기해 주세요, 하면 5분을 얘기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프랑스 사람들은 주변세계에 대한 관심이 폭넓은 편이에요. 구체적으로 많이 알고 있다고 느꼈어요. 어느 한 사람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일반인들이 알고 있어야 그 가치를 알고 보존하거든요.
사료 같은 경우에도 그래요. 1930-40년대 광고를 봤는데. 그 시대는 아무 것도 아니었지만, 지나고 보면 의미가 있거든요. 제 경우는 배가 전공인데요. 대하는 태도, 삶에 묻어있는 걸 간직하려는 게 커요. 네덜란드의 고문서보관소에서 놀란 게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이 와요. 마이크로필름으로 보는데요. 신기하죠. 물어보니까 자기 조상을 찾는다는 거예요. 그게 취미에요. 집을 추적하기도 하고, 가계도 그리는 걸 열심히 해요. 텔레비전 광고에 “가계도 그리느라 힘드셨죠. 이걸 써보세요!” 이런 광고가 나온다니까요. 역사가 일상화되어 있구나 싶었어요. 거기서 만난 할머니가 “너도 조상을 찾느냐”고 하셨어요. (일동 웃음) 우리가 삶을 대하는 태도와 다르다는 걸 느꼈어요. 우리는 쉽게 버리잖아요. 정신적인 것이나 물질적인 것 모두요. 그런데, 그들은 삶의 흔적에 애정이 강해요.
▶독자 3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하는데요. 어떤 의견을 갖고 계신가요.
▶주경철 유사한 성향을 보일 수도 있죠. “인간은 이런 법이구나!” 이런 판단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되겠죠. 마치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역사는 사고의 연습이니까 그런 걸 통해 지혜로운 결정을 내리거나 상황 파악을 한다거나 그런 차원이죠.
▶정재승 한 제국이 탄생하고 성장하고 쇠퇴하는 과정에서 어떤 유사성, 개별 현상을 관통하는 법칙이 있겠죠.
▶주경철 법칙은 아니고, 경향성은 있어요. 느슨하죠. 제국을 예로 들면, 굉장히 큰 단위의 문명이거든요. 큰 강이 있고, 강력한 권력집단이 생겨날 수밖에 없고, 관료가 생겨나고, 또 전쟁이 생기고. 그런데 중국과 메소포타미아가 달라요. 세부 단위로는 다르지만 큰 틀에서는 비슷하죠. 토인비 같은 사람은 세밀한 부분에까지 법칙화 하려 했어요. 역사학자 입장에서 토인비는 역사에서 이끌어낸 사상가지 역사가는 아니라고 보거든요.
역사학, 사고의 폭을 넓히고 조직화하는 능력 키운다
▶정재승 토인비는 “인간이 역사로부터 얻는 게 없으니, 그만큼 어리석은 존재도 없다”라고 했어요. 오늘의 내 삶을 표현하기 위해, 역사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주경철 역사가 무엇이냐, 왜 역사를 공부하느냐는 늘 제기되는 질문인데요. 완비된 답이 없어요. 지금도 묻고 있어요. 도움이 되긴 하지만 직접적으로는 도움이 안 돼죠. 인문학 전반이 그런 것 같은데, 사고의 폭이 넓어지고 사고를 조직화하는 능력이 좋아져서 무엇인가를 파악하고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됩니다. 역사의 사례를 많이 알고 거기서 끄집어내는 사고훈련을 많이 한 사람들은 세련된 결정을 하지 않을까 싶어요. 날림으로 사고하지 않죠. 정제된 사고에서 나오는 정제된 결정처럼 도움이 될 듯해요. 이걸 하니까 이게 도움이 된다는 식의 함수관계는 아니라고 봐요.
▶정재승 오늘날 내가 경험하는 제도, 책, 영화 등에서 봤던 일들이 역사적으로 이런 맥락이 있구나, 하는 걸 느낄 때가 있는데요. 글을 쓰실 때 비슷한 경험을 하시나요.
▶주경철 나도 모르게 하는 것 같아요. 역사가마다 특질이 있을 텐데요. 글이나 책을 쓸 때 즐기고 있다는 생각을 해요. 꼭 해야 되는 건 아닌데, 역사적으로 이런 내력이 있구나 알게 되는 거죠. 다른 걸 발견하는 도구로서의 역사도 중요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해요. 습관적으로, 집단적으로 봐왔던 것들은 ‘결’이 있겠죠. 역사학이란 다른 결과, 다른 이야기를 해주는 데 공헌이 있을 것 같아요.
▶정재승 특히, 스토리텔링에 강하신 것 같습니다.
▶주경철 그런 편이가요. 영어의 History는 그렇지 않지만, 불어로는 histoire가 이야기와 역사, 두 가지 뜻이에요. 역사와 스토리텔링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듯해요. 원론적으로 저같은 경우에는 더 민감한 편이구요. 전달의 문제도 있고요. 쓸 때 흘러가는 맛이 있어야 하니까요.
▶정재승 지금까지 썼던 책 중에서 최고를 뽑으신다면요. 가장 잘 쓴 책을 꼽아주세요. (일동 웃음)
▶주경철 저는 『대항해시대』죠. 가장 큰 집을 지었죠. 그거 짓느라고 고생도 많이 했구요. 작은 책을 쓸 때와 큰 책을 쓸 때는 정말 다른 것 같아요. 양을 3배로 쓴다고 3배로 힘든 게 아니라 전체를 관통하는 줄기가 있어야 하니까 몇 배나 더 힘들죠. 부실하지 않도록 다듬는 노력이 필요해요. 얘기가 될 때까지 찾아야 하고, 스토리의 완결성이 있어야 해요. 애정이 가장 많이 가죠. 6백 페이지 정도 되는데, 초고를 쓰고, 계속 고치는데요. 몇 번 정도 고쳤을까요? 1백 정도 고친 것 같아요. (모두 탄성)
사실 『대항해시대』는 아카데믹한 건데, 일반 독자들도 많이 읽으시는 것 같아요. 『문명과 바다』도 애정이 있는데요. 사료나 그림 자료를 제공해야 된다는 생각을 했어요. 역사학이란 게 기본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건데, 나는 이 주장을 하지만, 강요할 생각은 없어요. 상대방이 해석해 볼 수 있는 자유를 주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쉽지는 않지만요.
『대항해시대』, 큰 집을 짓느라 고생도 많았지만, 애정이 많은 책
▶정재승 지금까지는 대륙의 역사서를 봤는데요. 바다의 위치가 얼마나 큰지 알려줬다는 데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주경철 바다의 관점은 소통의 관점입니다. 중국을 보는 사람은 중국만 보고, 유럽을 보는 사람은 유럽만 보는데, 교통수단이 별로 없으니까 바다를 통해 이들이 교류했다고 보는 거죠. 폭력이 중요한 키워드가 되는데, 그 때는 유럽인들이 폭력으로 세계를 지배했다고 쓴 거 같은데, 지금 생각해 보면 넓은 의미의 폭력이에요. 아메리카에서 원주민한테 종교를 강요하면 종교적인 폭력이고, 영어를 쓰라고 하면 언어적인 폭력이고, 감자를 먹거리로 강권하게 되면 결국 감자의 폭력이고요. 폭력의 세계화라는 건 문명의 모든 요소들이 충돌했다는 것이죠. 바닷길을 여는 과정에서, 충돌하는 과정에서 유럽인들이 뇌관을 터뜨렸다고 봐야죠. 이것이 지금 말하고 싶은 폭력의 세계에요.
▶정재승 유럽만이 아니라 중국도 굉장히 폭력적이었더라구요.
▶주경철 그렇죠. 앞 연구자들의 도움을 많이 받아 알아본 부분이 많아요. 중국사, 남미 모든 역사를 다 건드려야했어요. 그렇다고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거든요. 깊이 있게 들어가지 못한 부분이 있죠. 그럼에도 일단 하나의 큰 틀을 만들어 보고 싶었어요. 갈증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정재승 후속편이 나오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큰 틀 다음의 이야기가 나왔으면 좋겠어요.
▶주경철 그게 전 연구계획서라고 생각했어요. 전체 오버뷰를 해봐야했습니다. 여러 챕터들이 있는데, 그걸 하나씩 들어가 보고 싶어요. 예를 들어 세계 화폐사, 노예, 심성 이런 주제들을 쓰고 싶어요. <대항해 시대> 버전 2가 나왔으면 좋겠다 싶어요. 이제 해야죠.
▶정재승 독자들의 질문을 다시 받아볼까요.
▶독자 4 우리나라에서 서양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새로울 수 있다고 하셨는데요. 외국에서 공부 하실 때, 우리나라 역사 발전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지셨는지 궁금합니다. 청소년 책을 쓰시면서 전하고자 했던 역사관이 있으셨는지요.
▶주경철 유럽에서 공부하면서, 우리 역사는 어땠을까 생각했습니다. 한국사를 완전히 새롭게 보는 사관이 정립된 건 아니지만요. 해보고 싶은 건 해적인데요. 해적 현상이 상당히 재미있어요. 머리에 떠오르는 게, 천하의 몹쓸 인간들이 살인하는 이야기 등인데요. 뭔가, 틀을 잡아서 이해해볼 만한 것 같아요. 권력이 있고, 그것이 포괄하는 게 있잖아요. 그런데 그조차 미치지 못한 새로운 권력관계였던 것 같아요. 군사적인 문제였을 수도 있고, 교역이었을 수도 있죠. 기존의 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새로운 제3의 권력 영역이었습니다.
해적이라는 게 여러 민족이 섞여있어요. 기존의 역사해석에서 벗어나 있는 집단이에요. 이렇게 보면 조금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 싶어요. 우리 역사를 더 큰 틀을 확보하다 보면, 이렇게 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도 드려야죠. 어떤 사관을 보여줘야겠다 이런 생각은 없어요. 꼭 이것만이 정답은 아닌데, 이런 것도 있고 저런 것도 있다 그러니 너만의 생각을 가져봐라, 한 가지 생각을 제시하는 것이 더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결국은 ‘네가 판단하는 거다’ 이런 생각에 가깝습니다. 특히, 청소년에겐 내 주장을 강하게 해서 그것만이 정답이라고 믿게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독자 5 추상적인 질문인데요. 역사를 바꾸는 원동력이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세계사의 관점에서 중요한 역사서 추천도 부탁드립니다.
▶주경철 정말 추상이네요. 혹시 질문하신 분은 그런 게 있나요.
결정론에 동의하지 않는 게 역사학의 기본적인 전제
▶독자 5 불평등이 발달하면 그것에 저항하는 어떤 움직임이 있는 것 같아요.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가지 힘> 이런 책도 있던데요.
▶주경철 사실, 저는 그런 게 없다고 봅니다. 원동력이라는 말 자체가 인간의 역사, 이것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외부적인 힘이죠. 혹은, 인간이 모여서 살아갈 때 숙명적으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속성입니다. 인간이 모이기만 하면 이렇게 간다, 이런 게 모이면 동력이 되겠죠. 지리적인 요인도 그 중 하나가 되겠네요. 저는 ‘결정론’이라는 것에 동의를 하진 않습니다. 여러 가지가 조화를 이뤄 영향을 미치는 것이지, 그것을 벗어난 숙명적인 요인이 있다고 보진 않습니다. 그것이 역사학의 기본적인 전제죠.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정재승 역사를 결정하는 요소는 없더라도, 중요하게 영향을 미치는 건 있지 않을까요
▶주경철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가지 힘>의 내용은 무엇이었나요? 음... ‘세계사를 움직이는’이라는 표현도 조심해야 할 것 같아요. 자기 나름대로 구성해서 설명을 하겠다는 거니까요. 제가 만약 바다의 관점에서 이야기한다 해도, 그것이 인간의 삶을 결정한다는 주장은 아닙니다. 별개의 힘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정재승 촛불집회 같은 역사적 사건을 어떻게 설명해주실까 궁금합니다. 어떤 역사의 흐름에서 보시나요.
▶주경철 문명론적인 렌즈로 하면 안 잡힙니다. 스케일로 보면, 이런 시기에 이런 의미를 갖고 이런 영향을 미친다, 거기에 맞는 렌즈를 대야 할텐데요. 한국사회의 변곡점을 일으킬 만한 사건이었다고 보진 않습니다. 9.11 같은 경우는 조금 다른데요. 큰 렌즈를 대고 봐야 할 사건이었죠. ‘더 이상 미국단독의 시대는 아니구나’ 라는 해석이 될 만한 사건입니다. 테러리스트의 사건사적인 설명에서 그칠 게 아니라 그 전, 그 이전까지 동원해서 풀이해야겠지요. 유라시아 대륙 내의 구조적인 갈등문제였던 이슬람문명권과 기독교문명권의 충돌, 근대산업사회의 발전과 그것이 서구사회에 미쳤던 영향. 그리고 20세기 미국의 패권. 그것이 흔들리는, 도전하는 이슬람 세계의 성장. 그것의 정점으로서의 9.11 이 정도의 해석이 필요하겠죠. 이렇게 쌓아 갈 것 같아요.
그런데 촛불 하면, 한민족까지 거슬러 가진 않습니다. 20세기 후반의 역사가 변화를 겪으며 여기까지 온 거죠. 책을 추천해달라고 하셨는데요. 역사공부를 탄탄히 하고 싶다면 브로델까지 읽어도 좋지만, 그 정도가 아니라면 홉스 봄을 추천합니다. 긴즈 버그라는 역사가도 좋고요. 섬세한 역사 읽기가 무척 인상적이에요. 나탈리 데이비스도 생각나네요.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쓴 에드워드 파머 톰슨 정도라면 진지하게 접근 해 볼 만합니다.
삶에 묻어있는 흔적에 대한 애정 아쉽다
▶독자 2 문화재와 관련해서 수업을 듣고 있는데, 서양은 문화재 관리를 잘 하고 있는데, 우리는 문화재를 파괴하고 있다고 합니다. 교수님이 보시기에 역사를 보는 눈에서 어떤 차이가 있나요? 문화를 돈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데요.
▶주경철 문화, 역사에 대한 사람들의 자세나 태도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프랑스 사람들의 경우엔 많이 알고 있어요. 단적인 예로 여기 있는 분 중 동대문에 대해 얘기해 주세요, 하면 5분을 얘기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프랑스 사람들은 주변세계에 대한 관심이 폭넓은 편이에요. 구체적으로 많이 알고 있다고 느꼈어요. 어느 한 사람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일반인들이 알고 있어야 그 가치를 알고 보존하거든요.
사료 같은 경우에도 그래요. 1930-40년대 광고를 봤는데. 그 시대는 아무 것도 아니었지만, 지나고 보면 의미가 있거든요. 제 경우는 배가 전공인데요. 대하는 태도, 삶에 묻어있는 걸 간직하려는 게 커요. 네덜란드의 고문서보관소에서 놀란 게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이 와요. 마이크로필름으로 보는데요. 신기하죠. 물어보니까 자기 조상을 찾는다는 거예요. 그게 취미에요. 집을 추적하기도 하고, 가계도 그리는 걸 열심히 해요. 텔레비전 광고에 “가계도 그리느라 힘드셨죠. 이걸 써보세요!” 이런 광고가 나온다니까요. 역사가 일상화되어 있구나 싶었어요. 거기서 만난 할머니가 “너도 조상을 찾느냐”고 하셨어요. (일동 웃음) 우리가 삶을 대하는 태도와 다르다는 걸 느꼈어요. 우리는 쉽게 버리잖아요. 정신적인 것이나 물질적인 것 모두요. 그런데, 그들은 삶의 흔적에 애정이 강해요.
▶독자 3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하는데요. 어떤 의견을 갖고 계신가요.
▶주경철 유사한 성향을 보일 수도 있죠. “인간은 이런 법이구나!” 이런 판단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되겠죠. 마치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역사는 사고의 연습이니까 그런 걸 통해 지혜로운 결정을 내리거나 상황 파악을 한다거나 그런 차원이죠.
▶정재승 한 제국이 탄생하고 성장하고 쇠퇴하는 과정에서 어떤 유사성, 개별 현상을 관통하는 법칙이 있겠죠.
▶주경철 법칙은 아니고, 경향성은 있어요. 느슨하죠. 제국을 예로 들면, 굉장히 큰 단위의 문명이거든요. 큰 강이 있고, 강력한 권력집단이 생겨날 수밖에 없고, 관료가 생겨나고, 또 전쟁이 생기고. 그런데 중국과 메소포타미아가 달라요. 세부 단위로는 다르지만 큰 틀에서는 비슷하죠. 토인비 같은 사람은 세밀한 부분에까지 법칙화 하려 했어요. 역사학자 입장에서 토인비는 역사에서 이끌어낸 사상가지 역사가는 아니라고 보거든요.
역사학, 사고의 폭을 넓히고 조직화하는 능력 키운다
▶정재승 토인비는 “인간이 역사로부터 얻는 게 없으니, 그만큼 어리석은 존재도 없다”라고 했어요. 오늘의 내 삶을 표현하기 위해, 역사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주경철 역사가 무엇이냐, 왜 역사를 공부하느냐는 늘 제기되는 질문인데요. 완비된 답이 없어요. 지금도 묻고 있어요. 도움이 되긴 하지만 직접적으로는 도움이 안 돼죠. 인문학 전반이 그런 것 같은데, 사고의 폭이 넓어지고 사고를 조직화하는 능력이 좋아져서 무엇인가를 파악하고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됩니다. 역사의 사례를 많이 알고 거기서 끄집어내는 사고훈련을 많이 한 사람들은 세련된 결정을 하지 않을까 싶어요. 날림으로 사고하지 않죠. 정제된 사고에서 나오는 정제된 결정처럼 도움이 될 듯해요. 이걸 하니까 이게 도움이 된다는 식의 함수관계는 아니라고 봐요.
▶정재승 오늘날 내가 경험하는 제도, 책, 영화 등에서 봤던 일들이 역사적으로 이런 맥락이 있구나, 하는 걸 느낄 때가 있는데요. 글을 쓰실 때 비슷한 경험을 하시나요.
▶주경철 나도 모르게 하는 것 같아요. 역사가마다 특질이 있을 텐데요. 글이나 책을 쓸 때 즐기고 있다는 생각을 해요. 꼭 해야 되는 건 아닌데, 역사적으로 이런 내력이 있구나 알게 되는 거죠. 다른 걸 발견하는 도구로서의 역사도 중요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해요. 습관적으로, 집단적으로 봐왔던 것들은 ‘결’이 있겠죠. 역사학이란 다른 결과, 다른 이야기를 해주는 데 공헌이 있을 것 같아요.
▶정재승 특히, 스토리텔링에 강하신 것 같습니다.
▶주경철 그런 편이가요. 영어의 History는 그렇지 않지만, 불어로는 histoire가 이야기와 역사, 두 가지 뜻이에요. 역사와 스토리텔링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듯해요. 원론적으로 저같은 경우에는 더 민감한 편이구요. 전달의 문제도 있고요. 쓸 때 흘러가는 맛이 있어야 하니까요.
▶정재승 지금까지 썼던 책 중에서 최고를 뽑으신다면요. 가장 잘 쓴 책을 꼽아주세요. (일동 웃음)
▶주경철 저는 『대항해시대』죠. 가장 큰 집을 지었죠. 그거 짓느라고 고생도 많이 했구요. 작은 책을 쓸 때와 큰 책을 쓸 때는 정말 다른 것 같아요. 양을 3배로 쓴다고 3배로 힘든 게 아니라 전체를 관통하는 줄기가 있어야 하니까 몇 배나 더 힘들죠. 부실하지 않도록 다듬는 노력이 필요해요. 얘기가 될 때까지 찾아야 하고, 스토리의 완결성이 있어야 해요. 애정이 가장 많이 가죠. 6백 페이지 정도 되는데, 초고를 쓰고, 계속 고치는데요. 몇 번 정도 고쳤을까요? 1백 정도 고친 것 같아요. (모두 탄성)
사실 『대항해시대』는 아카데믹한 건데, 일반 독자들도 많이 읽으시는 것 같아요. 『문명과 바다』도 애정이 있는데요. 사료나 그림 자료를 제공해야 된다는 생각을 했어요. 역사학이란 게 기본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건데, 나는 이 주장을 하지만, 강요할 생각은 없어요. 상대방이 해석해 볼 수 있는 자유를 주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쉽지는 않지만요.
『대항해시대』, 큰 집을 짓느라 고생도 많았지만, 애정이 많은 책
▶정재승 지금까지는 대륙의 역사서를 봤는데요. 바다의 위치가 얼마나 큰지 알려줬다는 데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주경철 바다의 관점은 소통의 관점입니다. 중국을 보는 사람은 중국만 보고, 유럽을 보는 사람은 유럽만 보는데, 교통수단이 별로 없으니까 바다를 통해 이들이 교류했다고 보는 거죠. 폭력이 중요한 키워드가 되는데, 그 때는 유럽인들이 폭력으로 세계를 지배했다고 쓴 거 같은데, 지금 생각해 보면 넓은 의미의 폭력이에요. 아메리카에서 원주민한테 종교를 강요하면 종교적인 폭력이고, 영어를 쓰라고 하면 언어적인 폭력이고, 감자를 먹거리로 강권하게 되면 결국 감자의 폭력이고요. 폭력의 세계화라는 건 문명의 모든 요소들이 충돌했다는 것이죠. 바닷길을 여는 과정에서, 충돌하는 과정에서 유럽인들이 뇌관을 터뜨렸다고 봐야죠. 이것이 지금 말하고 싶은 폭력의 세계에요.
▶정재승 유럽만이 아니라 중국도 굉장히 폭력적이었더라구요.
▶주경철 그렇죠. 앞 연구자들의 도움을 많이 받아 알아본 부분이 많아요. 중국사, 남미 모든 역사를 다 건드려야했어요. 그렇다고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거든요. 깊이 있게 들어가지 못한 부분이 있죠. 그럼에도 일단 하나의 큰 틀을 만들어 보고 싶었어요. 갈증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정재승 후속편이 나오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큰 틀 다음의 이야기가 나왔으면 좋겠어요.
▶주경철 그게 전 연구계획서라고 생각했어요. 전체 오버뷰를 해봐야했습니다. 여러 챕터들이 있는데, 그걸 하나씩 들어가 보고 싶어요. 예를 들어 세계 화폐사, 노예, 심성 이런 주제들을 쓰고 싶어요. <대항해 시대> 버전 2가 나왔으면 좋겠다 싶어요. 이제 해야죠.
▶정재승 독자들의 질문을 다시 받아볼까요.
▶독자 4 우리나라에서 서양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새로울 수 있다고 하셨는데요. 외국에서 공부 하실 때, 우리나라 역사 발전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지셨는지 궁금합니다. 청소년 책을 쓰시면서 전하고자 했던 역사관이 있으셨는지요.
▶주경철 유럽에서 공부하면서, 우리 역사는 어땠을까 생각했습니다. 한국사를 완전히 새롭게 보는 사관이 정립된 건 아니지만요. 해보고 싶은 건 해적인데요. 해적 현상이 상당히 재미있어요. 머리에 떠오르는 게, 천하의 몹쓸 인간들이 살인하는 이야기 등인데요. 뭔가, 틀을 잡아서 이해해볼 만한 것 같아요. 권력이 있고, 그것이 포괄하는 게 있잖아요. 그런데 그조차 미치지 못한 새로운 권력관계였던 것 같아요. 군사적인 문제였을 수도 있고, 교역이었을 수도 있죠. 기존의 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새로운 제3의 권력 영역이었습니다.
해적이라는 게 여러 민족이 섞여있어요. 기존의 역사해석에서 벗어나 있는 집단이에요. 이렇게 보면 조금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 싶어요. 우리 역사를 더 큰 틀을 확보하다 보면, 이렇게 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도 드려야죠. 어떤 사관을 보여줘야겠다 이런 생각은 없어요. 꼭 이것만이 정답은 아닌데, 이런 것도 있고 저런 것도 있다 그러니 너만의 생각을 가져봐라, 한 가지 생각을 제시하는 것이 더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결국은 ‘네가 판단하는 거다’ 이런 생각에 가깝습니다. 특히, 청소년에겐 내 주장을 강하게 해서 그것만이 정답이라고 믿게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독자 5 추상적인 질문인데요. 역사를 바꾸는 원동력이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세계사의 관점에서 중요한 역사서 추천도 부탁드립니다.
▶주경철 정말 추상이네요. 혹시 질문하신 분은 그런 게 있나요.
결정론에 동의하지 않는 게 역사학의 기본적인 전제
▶독자 5 불평등이 발달하면 그것에 저항하는 어떤 움직임이 있는 것 같아요.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가지 힘> 이런 책도 있던데요.
▶주경철 사실, 저는 그런 게 없다고 봅니다. 원동력이라는 말 자체가 인간의 역사, 이것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외부적인 힘이죠. 혹은, 인간이 모여서 살아갈 때 숙명적으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속성입니다. 인간이 모이기만 하면 이렇게 간다, 이런 게 모이면 동력이 되겠죠. 지리적인 요인도 그 중 하나가 되겠네요. 저는 ‘결정론’이라는 것에 동의를 하진 않습니다. 여러 가지가 조화를 이뤄 영향을 미치는 것이지, 그것을 벗어난 숙명적인 요인이 있다고 보진 않습니다. 그것이 역사학의 기본적인 전제죠.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정재승 역사를 결정하는 요소는 없더라도, 중요하게 영향을 미치는 건 있지 않을까요
▶주경철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가지 힘>의 내용은 무엇이었나요? 음... ‘세계사를 움직이는’이라는 표현도 조심해야 할 것 같아요. 자기 나름대로 구성해서 설명을 하겠다는 거니까요. 제가 만약 바다의 관점에서 이야기한다 해도, 그것이 인간의 삶을 결정한다는 주장은 아닙니다. 별개의 힘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정재승 촛불집회 같은 역사적 사건을 어떻게 설명해주실까 궁금합니다. 어떤 역사의 흐름에서 보시나요.
▶주경철 문명론적인 렌즈로 하면 안 잡힙니다. 스케일로 보면, 이런 시기에 이런 의미를 갖고 이런 영향을 미친다, 거기에 맞는 렌즈를 대야 할텐데요. 한국사회의 변곡점을 일으킬 만한 사건이었다고 보진 않습니다. 9.11 같은 경우는 조금 다른데요. 큰 렌즈를 대고 봐야 할 사건이었죠. ‘더 이상 미국단독의 시대는 아니구나’ 라는 해석이 될 만한 사건입니다. 테러리스트의 사건사적인 설명에서 그칠 게 아니라 그 전, 그 이전까지 동원해서 풀이해야겠지요. 유라시아 대륙 내의 구조적인 갈등문제였던 이슬람문명권과 기독교문명권의 충돌, 근대산업사회의 발전과 그것이 서구사회에 미쳤던 영향. 그리고 20세기 미국의 패권. 그것이 흔들리는, 도전하는 이슬람 세계의 성장. 그것의 정점으로서의 9.11 이 정도의 해석이 필요하겠죠. 이렇게 쌓아 갈 것 같아요.
그런데 촛불 하면, 한민족까지 거슬러 가진 않습니다. 20세기 후반의 역사가 변화를 겪으며 여기까지 온 거죠. 책을 추천해달라고 하셨는데요. 역사공부를 탄탄히 하고 싶다면 브로델까지 읽어도 좋지만, 그 정도가 아니라면 홉스 봄을 추천합니다. 긴즈 버그라는 역사가도 좋고요. 섬세한 역사 읽기가 무척 인상적이에요. 나탈리 데이비스도 생각나네요.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쓴 에드워드 파머 톰슨 정도라면 진지하게 접근 해 볼 만합니다.
▶독자 7 ‘설문해자說文解字’를 공부하는 영문과 학생입니다. 공부하면서 ‘언어는 역사의 화석이다’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국수주의자가 되고 싶진 않지만, 한자어를 모르면 해석의 한계를 겪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좋아합니다. 이기백 선생님의 역사 수업을 대학 1학년 때 들으며 ‘신이 사관’이라는 걸 처음 들었어요. 쉽게 풀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잖아요. 구술사, 이야기로 풀어쓴 역사고요. 이런 걸 배우면서 사람들의 고정 관념과 다른 생각을 갖게 되는데, 그걸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또, 서양사학을 공부하시면서 중국과 같은 공간과의 교류를 얼마나 고민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주경철 ‘설문해자’가 전해주는 지혜가 있겠죠. 근대 역사학이 주는 이야기와 다른 울림이 있습니다. 그걸 이쪽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건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과학적 진리만 있는 게 아니라 신적 진리도 있으니까요. 그것이 우리의 삶을 풍부하게 해주기도 하죠. 하지만, 그것이 입체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매몰 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계속 공부만 하고 싶다면, 거기서 멈추면 안 됩니다. 다른 틀에 담아 사람들에게 전할 수도 있어야겠죠.
제가 넘겨 짚어보면, 동양적인, 전통적인 것이 홀대받았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물론,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어디까지 이야기해서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 봐야 합니다. 또, 저 보고 어느 정도 공부를 했나 물어보셨는데요. 조금 했습니다. 폭넓게 하지도 못했고, 깊이도 부족하지만 앞으로 열심히 할게요.
▶정재승 ‘언어는 역사의 화석’이라고 하셨는데요. 역사에 관심 있는 학생들에게 조언을 주신다면요.
▶주경철 ‘역사 언어학’이라는 게 있습니다. 언어에 집중해서, 언어 자체로 역사를 보는 거죠. 그것이 단어나 언어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요. 그런데, 그건 역사학이 아니라 언어학에 속합니다. 역사언어학이 어느 정도의 중요성을 갖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안에서도 논쟁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개념사도 있겠죠. 그것 자체를 이해하는 것도 흥미로울 수 있겠습니다. 다른 역사학적인 걸 연구하면서 새로운 문을 열 수도 있겠죠.
유럽인들이 왜 대양을 건넜을까? 차기작은 콜럼버스에 대한 책
▶정재승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조만간 <대항해 시대> 2가 나올 것 같아요.
▶주경철 조만간? (웃음) 지금 계획하고 있는 건 콜럼버스에요. 유럽인들이 왜 대양을 건넜을까. 왜 나가면 난폭해졌나 이런 것에 대해 생각해보려고요. 중세유럽인에 대한 관심이죠. 콜럼버스라는 개인의 심성을 읽으며 중세유럽인들을 보려고 합니다.
▶정재승 사변적으로 돌아와, 마지막 질문 드립니다. 한국에서 인문학 교수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주경철 마지막 질문이 어렵네요. 한참 살아야 하는데 이런 질문을 하시네요. 비교적 일찍 교수가 되었습니다. 여러 역할을 나도 모르게 했습니다. 잘 하진 못했지만, 넌 교육자야 이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학생들을 잘 가르쳐야한다는 생각이죠. 또 역사 연구자였어요. 학계에 공헌도 해야 했고요. 제도권에 속해 있는 교수이기도 했습니다. 10가지 일을 동시에 한 적도 있었어요. 잘한 건 아니고 얼추 했다고 생각해요. 갈증은 있었죠. 버르장머리 없는 말일 수도 있는데요. 그간, 내 삶을 디자인하면서 살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이제 50이 되었는데, 앞으로 이렇게 살아야지, 그걸 위해 이런 것도 해야지 이런 디자인을 하고 싶어요.
책 쓰기도 그 안에 포함되어야겠죠. 교육도 당연히 들어가고요. 내가 원하는 대로 생각을 하고, 거기에 맞춰 살고 싶어요. 남이 나한테 시키는 게 4라면 내가 하고 싶은 교육, 공부, 여가가 6이었으면 해요. 인문학을 하는 사람은 끌려 다니면 안 됩니다. 노예처럼 살며 다른 사람을 해방시켜주겠노라 할 순 없어요. 자기 삶에 투철하고 자신이 있어야겠죠. 약간의 모범도 보여야하고요. 관료처럼 살면 말이 안 된다고 봐요. 그렇게 할 수 없는 측면도 일부 있었겠지만. 커밍아웃일 수도 있겠지만, 내 공부를 하고 싶어요. 그렇게 살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살고자 해요.
◆주경철=1960년 생.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서양사학과 석사.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 박사. 현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자유전공학부 부학부장. 저서 『역사의 기억, 역사의 상상』(1999),『테레시아스의 역사』(2002),『문학으로 역사읽기, 역사로 문학읽기』(2009), 『근대 유럽의 형성』(공저?2011) 등 ******
*기사 원문 보기
-중앙일보 joongang.joinsmsn.com/article/aid/2011/09/19/5867023.html
-YES24 inmun.yes24.com/articles/commonview/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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