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오늘] 작은 낌새에도 “물고문… 발가벗기고…”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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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낌새에도 “물고문… 발가벗기고…” 고통
힐디강 ´검은 우산 아래서´ 백선엽과 다른 생활상들 “야쿠자식 장사 배워…”
조현호 기자 | chh@mediatoday.co.kr
일제 식민지 시기 우리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일제시대 만주와 간도의 독립군을 때려잡던 간도특설대에 복무했던 친일파 백선엽씨가 한국전쟁 전후로 한국군 장성으로 승승장구했던 사례는 참혹한 시기 우리 역사의 비극적 굴절이자 극적인 반전에 불과하다. 실제 역사 속에 묻혀간 수많은 우리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당시 삶은 상상 이상으로 고통스러웠지만, 다양했다. 공통적이라고 한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아주 작은 의심에도 일제의 감시와 차별에 시달려야 했다는 점이다.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및 데이비스 캠퍼스에서 초빙강사로 활동중인 힐디 강씨가 지난 2001년 발간한 ‘검은 우산 아래에서’가 11년 만에 한국어로 번역 출간됐다. 힐디 강은 미국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51명의 한국인 인터뷰를 통해 일제 강점하 조선인들의 삶의 궤적을 추적했다. 여기에는 이들의 해방 후 행적도 포함돼 있다.
고 김찬도(1911년 평북 출생)씨와 부인 고 이옥현(1907년 황해도생)씨는 일제의 번득이는 감시에도 불구하고 농촌에서 민족운동을 벌인 부부였다. 힐디 강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이들 부부를 만나려 했지만 김씨가 병으로 사망해 이옥현씨만 인터뷰했다.
목사의 딸인 이씨는 원산여학교에서 1930년 3월 광주학생운동(1929년 11월) 동조 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붙잡힌 일부터 기억했다. 여학생들을 수용할 곳이 없어 경찰본부로까지 끌려갔지만 그곳에서도 이들은 계속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그들의 부모님들이 위태롭게 여기면서도 많은 관심을 보인 것에 흥미와 재미를 느꼈었다고 이씨는 회고했다.
그러다 만난 김찬도씨. 같은 기독교 집안의 아들인 김씨는 1926년 수원고동농림학교에 입학했는데 농촌계몽운동에 참여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 뒤 김씨는 졸업반일 무렵 농부들에게 온종일 말을 걸고 ‘역사’, ‘농업’, ‘반일사상’을 가르치는 등 농촌운동에 나섰다. 김씨는 1928년 경찰에 체포됐고, 농촌운동의 주동자급이었던 김씨는 숱한 고문을 당했다.
힐디강 저서 ´검은우산 아래에서´(번역본) |
김씨는 보호관찰 3년형을 받고 결혼식을 올렸는데, 식장에도 형사가 김씨와 동행할 정도였다. 전과자라 취직할 곳이 없던 김씨 부부는 결국 1933년 만주국 연변부근의 용정에 있는 캐나다 선교시설로 떠났다. 교사를 했던 김씨는 그곳에서도 학생들에게 반일교육을 했다. 1938년 다시 황해도 황주로 귀국한 김씨 부부는 해방될 때까지 감시에 시달렸다. 김 씨는 해방 후 공산당을 피해 월남했지만 남한에서도 간첩으로 몰려 투옥됐다. 1990년이 돼서야 김씨는 한국정부로부터 항일활동에 대한 보상으로 훈장을 받았다.
고 홍을수(1905년 양산생)씨의 이야기는 일제하 가난한 집안 출신의 입지전적 인물의 행로를 잘 보여준다. 그는 가난을 벗고자 젊은 시절 일본으로 갔다. 그는 야쿠자가 운영하는 시장에서 ‘바람잡이’식 장사법을 배워 돈을 벌어 대학에 진학했다. 한 때 일본인 공산주의 그룹에 동참했으며 1929년 3·1운동 10주년 기념식 계획 중에 경찰에 붙잡혀 투옥됐다. 그는 공산주의를 포기(전향)하고 감옥에서 풀려나 아오야마 대학에서 교사 자격증을 취득해 귀국했다.
그러나 이미 일제의 감시 대상에 오른 그의 귀국 후 삶도 순탄할 수 없었다. 홍씨는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배화여고보) 교사로 취직했지만, 형사들의 감시와 교사직을 그만 두라는 협박에 결국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홍씨는 부산으로 내려가 일본에 면화를 수출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한편으로 ‘삼육회’라는 비밀모임을 만들어 계몽운동도 병행했다.
그러나 그의 이같은 ‘이중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사업이 나름대로 뿌리를 내렸지만, 사업관계로 친해졌던 일본 고등경찰로부터 블랙리스트에 자신도 포함돼 있다는 말을 듣고 그는 곧 자신의 과거를 아무도 모르는 시골(경북 경산)에 가 농사를 지었다. 시골에서는 드물게 아사히신문을 구독하고 성능 좋은 라디오를 갖고 있던 그는 곧 일본이 패망할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이 책에는 이밖에도 함석헌 선생을 모시고 비밀모임을 같이하다 물고문에, 발가벗겨 노역하는 일에 내몰렸던 이하전(1921년 평남출생) 등 다양한 이력의 일제하 생활상이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별 생각 없이 ‘소소하게’ 그 시절을 살아온 기록에는 아무 탈 없이 잘 지낸 이들의 기록도 있다.
하지만, 전신기사였던 최판방(1912년 경북 출생)씨나 교사였던 최길성(1911년 경기생)씨 같은 경우 처럼 당시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직장과 일상에서 ‘차별’과 ‘멸시’를 받아야 했다.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조선말투가 남아있다는 이유로 경멸당하고, 좌천당해야 했던 이들의 ‘기억’이 뚜렷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살아남기 위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박해를 당하고도 그러려니 했지만 그건 조선인의 정서에 무척 큰 상처였다.”
최길성씨에게는 죽을 때 까지 지워지지 않는 ‘상처’였다.
*기사 원문 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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