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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타임즈] 섣부른 경험주의가 만든 편견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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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1-06-15 00:00 조회1,53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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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부른 경험주의가 만든 편견의 역사


마이클 에이더스의 ‘기계, 인간의 척도가 되다’


2011년 03월 09일(수)






그리 멀지 않은 옛날, 아프리카 식인종에 사로잡힌 백인이 있었다. 그를 끈으로 붙잡아 맨 식인종이 펄펄 끊는 물에 몰아넣으려는데 백주대낮이 서서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개기일식 현상이 시작되었던 거였다. 기지를 발휘한 백인은 자신을 ‘지상에 내려온 태양신의 아들’이라 칭하곤 “자신을 위협한 만큼 태양신은 빛을 거두어가는 형별을 내릴 것”이라고 사자후를 토했다. 반신반의하는 식인종은 날이 밤으로 변해가자 겁에 질렸고, 끈을 푼 뒤 손이 닳도록 싹싹 빌어 용서를 구했다. 개기일식 덕분에 칙사 대접을 받은 백인은 유유히 그 마을을 벗어났다는 이야기. 어려서 한두 번은 들었다.



‘김찬삼 세계여행기’를 보면, 갑자기 배 아파하는 아프리카 원주민에게 상비로 가지고 다니던 환약을 주어 이튿날 무사히 낫게 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환약의 약효 때문에 낫다기보다 동양인이 지닌 뭔가 신비한 약에 무한한 신뢰심을 가졌기 때문일지 모르는데, 어쩌면 환약의 마법을 믿는 유럽의 백인이 있더라도 그에게 같은 효과가 나타났을 수 있겠다. 물론 환약에 이미 익숙한 우리에게도 만병통치 효과로 이어질 리 만무하겠지만. 어설프게 알거나 경험이 전혀 없을 때 묘약에 대한 신비감은 더해질 수 있는데, 환약을 모른다고 우리가 비아시아 인을 미개하다고 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개기일식 현상을 모른 원주민은 미개할 걸까.





‘과학, 기술, 그리고 서양 우위의 이데올로기’라는 부제를 단 ‘기계, 인간의 척도가 되다’는 과학과 기술을 선점한 유럽인이 한동안 가진 우월감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조명하고 그 부작용을 돌아본다.



문명의 흔적이라곤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아프리카는 말할 것도 없고, 훌륭한 수학의 역사를 가진 인도, 일찍이 나침반과 화약과 종이를 발명한 중국이 쳐진 건 “진취적으로 발전해간 유럽과 달리 조상의 업적에 만족한 그들은 퇴보했기 때문”이라고 유럽인들은 풀이했다. 그래서 비서양인은 필연적으로 백인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으며 백인들은 그들의 개화를 위해 거룩한 노력을 베풀어야 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고마워해야 할 비유럽 인종이 감히 백인에게 도전하는 건, 도리를 어기는 일이라 여겼을 것이다.



대부분의 노벨상은 백인들이 차지한다. 그들이 그만큼 똑똑하다는 게 경험적으로 증명되는 듯한데, 비슷한 맥락으로 아직도 미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은 지능이 떨어지는 걸까. 그러므로 삼각함수도 풀 수 없을까.



어려서 막연히 그리 생각하면서도 한편 우리가 그렇듯, 원주민의 아기를 서양에서 잘 키우면 백인만큼 똑똑해질 수 있겠다 싶었다. 요즘 열심히 영어 배우는 우리의 아이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과거와 분명히 다르겠지만 무수히 많은 경험적 사실은 그들의 교육과 문화, 그리고 과학과 기술이 여전히 문명을 선도하고 있으며, 그들에게 배운 뒤 돌아와야 출세한다는 걸 아무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고생물학자는 “부츠와 장갑, 바바리코트와 중절모, 그리고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씌운 네안데르탈인을 러시아워의 맨해튼 지하철 플랫홈에 세워놓는다면 수많은 인파는 키가 큰 시민의 한 사람으로 착각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네안데르탈인이 지금 다시 태어난다면 우리와 지능이 다를 게 없다는 주장을 한 것인데, 그럴까. 경험적 증거가 없으니 확신할 수 없다. 네안데르탈인은 오래전 인종이니 따지지 말고, 동시대를 사는 인종은 어떤가.





인종 간 우열을 자의적으로 판단해온 역사





흑인이든 백인이든 우리와 같은 아시아 인종이든, 사는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말과 식성과 생활습관과 겉모습을 주관적으로 평가해 우열이나 주종관계로 귀결시키는 태도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걸 요즘 동의하지 않는 이는 거의 없다. 그간 숱한 갈등과 경험이 충분히 증명했기 때문이리라. ‘기계, 인간의 척도가 되다’을 쓴 마이클 에이더스는 환경보다 경험적 사실을 바탕으로 기술을 선도한 유럽인들이 인도와 중국과 아프리카를 대상으로 우열관계를 자의적으로 판단해온 역사를 꼼꼼하게 기록했다. 그는 과학과 기술이 만든 유럽인들의 섣부른 결정론을 비판하지만, 그렇다고 비서양인에게 대신 사과하는 건 아니다.



산업혁명 이전, 그러니까 기계가 유럽문명을 개편하기 이전에 유럽 밖을 나간 백인들은 과학과 기술로 인종의 우열을 평가하려 들지 않았다. 기계나 도구의 두드러진 차이를 발견할 수 없기도 했겠지만 대부분 선교사였던 까닭에 과학과 기술의 세밀한 차이를 구별할 식견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유일신인 기독교의 우월성을 과시하고 선교하기 위해 나갔으므로 자신들의 경험적 세계에 없는 이질적 삶을 폄하하는데 주력했을 따름이었다. 천성적으로 게으르다거나 우상을 숭배한다며 얕잡아보고, 신체의 특징을 자민족 편향으로 해석해 피부가 검고 머리카락이 뻣뻣하며 코가 납작해 짐승을 닮았다는 식으로 조롱했다. 기술에 대한 평가는 그저 농업이 낙후되었다거나 시계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정도에 그쳤다.




▲ 유럽이 계몽시대로 접어들면서 과학과 기술로 인류의 세계를 평가하려는 시도가 정착되었다.

유럽이 계몽시대로 접어들면서 과학과 기술로 인류의 세계를 평가하려는 시도가 정착되었다. 비서양인을 본격적으로 열등하다고 평가하기에 이른 것이다. 아프리카는 대놓고 깔보았고 화약을 발명해놓고 대포를 개발하지 못한 점, 종이와 목판인쇄가 인쇄기로 이어지지 못한 점 들을 예로 들며 ‘중국은 자신의 발명을 발전시킬 능력이 없어 과학 전 분야에서 유럽에 훨씬 뒤지게 되었다’고 확신했다. 도구는 조잡하고 관찰에 엄밀성이 없다는 건데, 그러다보니 유럽의 군함 한 척이면 중국 전 해군과 맞설 수 있다거나 중국의 과학지식은 유럽인의 서랍 하나보다 나을 게 없다고 폄하했다.



수학에 대단한 업적이 있던 인도도 깔보는 대상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유럽은 방앗간 일꾼 한 명이 하루에 543킬로그램의 밀을 갈 수 있는데 인도는 일꾼 두 명이 고작 22킬로그램에 그칠 뿐이라며 비웃었다. 정도에 차이는 있었지만 볼테르를 비롯한 대부분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과거의 일부 찬란한 문화가 있더라도 중국과 인도의 과학과 기술은 유럽보다 열등하다고 단정했다.



산업혁명으로 기계문명이 세계를 석권하기 시작한 제국주의 시대, 중국과 인도의 과학과 기술은 열등함의 상징이 되었다. 인종적 편견까지 앞세워 피부색은 물론 두개골의 용적을 제멋대로 비교해 열등하다는 걸 합리화했다. 모멸적인 용어로 인종의 서열을 정하면서 아프리카 흑인의 경우 능력이 없는 인종임을 노골적으로 부각했다. 총과 나침반, 하다못해 단추와 성냥으로 아프리카인을 놀려댄 서양인은 인도인은 더럽고 부정직하며 근육이 발달되지 않은 채 감각적일 뿐이라고 무시했고 중국인은 솜씨 없고 호기심도 없는 구제불능의 인종이라며 얕잡았다.



20세기 후반에 와서 “문명화 사명이란 실제로는 천박하기 짝이 없는 동기를 인간조건 향상을 위한 유럽인의 숙명이라는 거창하고 진부한 표현으로 고상하게 치장하려는 위선적인 시도”로 반성하는 이가 나왔지만, 무시무시하게 개조한 기술의 추악한 모습을 경험하고 진저리친 2차대전 이전에는 그저 과학과 기술로 인간을 섣불리 비교하고 배척했다. 정치인은 물론이고 선교사도 그랬고 마르크스와 같은 사상가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과도한 기계화는 2차대전 이후 비인간적인 참상을 불렀다. 유럽 노동자의 비참한 모습은 행복과 무관했고 과학기술이 선도한 전쟁무기는 끔찍한 살상을 자행하기에 이르렀다. 150년 동안 서양인의 의식을 오만하게 지배한 과학기술 진보에 대한 믿음과 신념은 영원히 추락하고 만 것인가. 감성적 동물인 인간이 과학과 기술을 무기로 삼을 때 잔혹하게 된다는 걸 간파한 버트런드 러셀을 책 말미에 소개하는 마이클 에이더스는 ‘기계, 인간의 척도가 되다’에서 기계문명을 전면 거부하자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터무니없는 어리석음으로 격하된 유럽의 기계문명이 아니라 대안으로 E. F. 슈마허가 제창한 중간기술을 제안한다. 누구나 필요할 때 활용할 수 있는 말랑말랑한 기술이다.





기계에 의존할수록 기계를 벗어날 수 없다






▲ 맹자는 기계에 의존할수록 기심(機心)이 생긴다고 말했다.

기계에 의존할수록 욕심이 커지는 사람에 기심(機心)이 생긴다고 2천300년 전 맹자가 말했다. 기계에서 벗어날 생각을 못한다는 거다. 언제부턴가 내비게이터 없이 길을 못 찾고 가라오케 없이 노래를 부를 수 없으며 컴퓨터 없이 한 줄의 원고도 작성할 수 없는 우리가 그리 되었다. 친구는 물론 가족의 전화번호도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는 시방 진보하고 있는가. 그런 진보. 내일을 위해 환영할 만한가. 지구온난화를 이산화탄소 저장기술로 극복하고 석유위기를 바이오연료로 해결하려는 인간은 이미 기심이 찌들대로 찌들어 헤어날 방법마저 잃어간다. 이제 기심에 길든 몸은 돌이킬 수 없다.



비록 몸은 기계가 주는 편의에 길들어졌지만 마음까지 돌이키지 못한다면 내일이 얼마나 참담하게 될까. 기심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몸을 구하려면 반성이 먼저 필요할 테니, 다소 무겁고 지루한 ‘기계, 인간의 척도가 되다’가 널리 추천되었으면 참 좋겠다. 다정한 친구와 마주앉아 스마트폰만 바라보는 젊은 세대의 건강한 내일을 위해 더욱 그렇다.





박병상(인천 도시생태ㆍ환경연구소 소장)




저작권자 2011.03.09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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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 인간의 척도가 되다> 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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