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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기득권에 맞서 ‘문화투쟁’… 새 세상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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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10-29 00:00 조회1,43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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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서(禁書).’ 간행이나 열람, 유통, 소지가 금지된 책을 말한다. 역사상의 금서는 그 시대의 지배적 가치관을 거스르는 생각이 담긴 책들이다. 이 같은 책이 민중으로 전파되는 것에 대한 지배층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조선왕조는 정감록(鄭鑑錄)을 왜 그리도 두려워했을까.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이공에게는) 아들 셋이 있었는데 큰아들은 일찍 죽고, 둘째 심과 셋째 연이 정감(鄭鑑)이라는 사람과 함께 팔도를 유람했다. 정감은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의 은사인 수경 선생 사마휘나 지략가 제갈공명보다도 더 나은 사람이었다.” 큰아들이 죽었다는 치명적 흉조를 지닌 이공(李公)은 사마휘나 제갈공명보다 낫다는 정감과 극단적으로 비교된다. 거울을 뜻하는 감(鑑)이라는 이름도 청동기 시대 우두머리가 가진 권위를 상징한다. 이처럼 정감록은 이씨 왕조의 몰락과 새로운 정씨 왕조의 등장을 예언했다. 당연히 조정은 이 책을 금지했지만 보란 듯이 정감록은 세상에 나온 지 30여 년 만에 전국으로 확산됐으며 훗날 동학, 원불교 등으로 이어져 계속 영향력을 발휘했다.



우리 역사 속 참서(讖書·예언서)에 천착해온 저자는 금서를 둘러싼 논쟁을 ‘문화투쟁’으로 설명한다. 새로운 시대의 가치와 이념을 제시하려는 세력과 이를 억누르려는 기득권 세력 사이 문화적 헤게모니를 둘러싼 갈등과 대립으로 바라본 것이다.







‘문화투쟁’의 관점에서 이 책은 ‘정감록’을 포함해 조선 중·후기부터 최근까지 금서 논란에 휩싸였던 책 8권을 소개한다. 중국 외교관 황준헌(黃遵憲)이 쓴 책으로 조선 말 개화파와 수구파 간 갈등의 원인이 된 ‘조선책략’, 한일 강제병합 전후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조선인의 애국심을 고양한다는 이유로 각각 금서가 된 안국선의 ‘금수회의록’과 신채호의 ‘을지문덕’, 월북시인의 시집이란 딱지가 붙어 금서가 된 ‘백석 시집’, 1970년대 부패한 독재정권을 비판하고,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을 소개했다는 이유로 각각 금서가 된 김지하의 ‘오적’과 리영희의 ‘8억인과의 대화’, 그리고 지리산 빨치산의 역사를 다뤘다는 이유로 15년간 금서 논란에 시달린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분석 대상이다. 이를 통해 한국 근현대사를 새롭게 조명한다.



몇십 년 전만 해도 금서였던 ‘오적’과 ‘태백산맥’이 이젠 각종 면접시험의 단골 소재가 되면서 대입, 혹은 취업 준비생이라면 읽어야 할 책이 됐다. 신채호가 ‘을지문덕’을 통해 주장한 민족주의 영웅사관은 다문화 사회로 접어든 오늘날과는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공산화한 중국에 대해서 당시 한국 정부가 주장한 내용을 뒤집었던 ‘8억인과의 대화’ 역시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정보의 부족과 편향성으로 그릇된 부분이 적지 않다고 저자는 말한다. ‘태백산맥’의 경우 한국 사회에 빨치산에 덧칠된 역사의 어두운 그림자를 벗기는 데 큰 역할을 했지만 역시 민족주의의 덫에 갇혀 있다는 한계를 보인다고 지적한다.




이처럼 시대는 변하고 금서가 추구하는 내용을 받아들이는 대중의 자세 역시 달라진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각 장을 수놓는 8권의 금서, 정확히는 금서였던 책을 바로 오늘의 관점에서 다시 읽고 싶어지게 만든다. 쉽고 재미있다는 점은 이 책의 큰 미덕이다. 특히 입말체로 쓰여 흥미로운 역사 강의를 듣는 것 같다. 저자가 올 초 서울 종로구 계동 인문학박물관에서 진행했던 강의를 책으로 정리한 점이 반영됐다.



서양 중세의 로마 교황청은 교리에서 한 치라도 벗어나는 글은 종류 여하를 막론하고 금지했다. 그런데 수도사들이 늘 금서 목록에 있는 책만 찾아 읽다 보니 그 목록만 닳곤 했다. 여기서 ‘인덱스(index)’, 즉 ‘중요 항목을 뽑아 별도로 정리한 목록’이라는 말이 유래했다고 한다. 금지된 책에서 탄생한 중요한 목록이라니. 인덱스야말로 문자의 출현만큼이나 오래됐다는 금서의 의미를 그 본질에 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만큼 먼 훗날 인덱스가 될 만한 도발적인 불온물, 즉 새로운 금서는 이 시대에도 변함없이 필요할 것이다.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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