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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신문] 주말을 여는 책-직업외교관 집념으로 되살린 몽유도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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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3-11-12 00:00 조회3,01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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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미례 언론인·번역가



역사교과서 왜곡 논란으로 대표되는 역사교육에 대한 비판이 요즘처럼 첨예하고 광범위하게 사회를 들끓게 한 적은 없었다. 편년체로 쓰여진 답답한 왕조사 위주의 교과서를 달달 외워야 했던 우리 학생들은 건국 60년이 넘는 21세기인데도 마침내 국사교육 자체가 뒷전으로 밀려난 상황에서 현대사 부분에 지배권력의 입맛에 맞춘 친일 독재 예찬의 내용까지 들어간 질 낮은 교과서를 들고 공부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래선지 역사교육은 죽었다는 자조 섞인 비판이 역사학계와 교육계 양쪽에서 나온다. 그런데도 인문학 독서물로서의 역사를 다룬 책들의 인기가 10년을 두고 지속적으로 치솟고 있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그것은 훌륭한 저자들이 교과서같은 제약 없이 역사 속의 어떤 특정 인물이나 사건을 비교적 자유로운 시각으로 끈기있고 치밀하게 다룬 저술을 내놓아 대중의 감성을 움직이고 호응을 이끌어 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도 그런 책들 중의 하나이다.



한 직업외교관이 가지고 있던 안견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에 대한 감탄과 호기심, 거기서 발전한 애정과 집착, 한국에서 사라져 일본 덴리(天理)대학에서 다시 나타나기까지의 유랑의 역정에 대한 궁금증이 이 책을 만들었다. 안견의 그림과 안평대군을 비롯한 당대 학자들이 써 붙인 23편의 찬문을 합친 ´몽유도원도권´을 두고 머리를 싸매고 이 비운의 문화재에 대한 연구에 몰입했고 수없이 일본을 드나들며 이것이 왜 덴리대에 보관되었는지 발로 뛰며 추적했으니 한 외교관의 지성과 감성, 행동이 총체적으로 투입된 결과물이 이 책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30초의 관람만 허용된 몽유도원도



저자 김경임 교수(중원대)는 서문에서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를 이렇게 말한다.



"몽유도원도! 그 이름만으로도 아름다움과 신비감을 불러 일으키며 우리 모두를 사로잡는다. 필자 역시 오래전부터 ´몽유도원도´에 매료되어 이에 관한 글을 써보려고 준비해왔다. 그러던 중 2009년 9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한국 박물관100주년 기념 특별전´에 이 서화가 전시됐을 때, 길게 줄을 서서 몇 시간씩 기다린 사람들에게 30초가 허용됐던 일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 때 느꼈던 비애와 분노는 필자만의 감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필자는 이때부터 ´몽유도원도´가 일본으로 넘어가 덴리대학에 소장된 경위와 과정을 본격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했다"



저자는 대학에서 미학을 전공했으며 외무고시 최초의 여성합격자로 도쿄, 뉴욕, 파리, 뉴델리, 브뤼셀, 튀니스에서 근무했고 외교부 문화외교국장과 튀니지대사를 역임했다. 파리 유네스코 한국대표부에 근무할 때 세계문화재 약탈과 반환에 관심을 가지고 조사 연구한 저서 "클레오파트라의 바늘_세계문화유산 약탈사"를 펴내기도 했으니 이 책을 내기에는 가장 적임자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책의 구성은 다음과 같은 10부로 되어 있다. 1. 몽유도원도, 일본땅에 나타나다 2.조선의 황금기가 절정을 넘어가다 3.무릉도원 꿈의 주인 안평대군 4.안평대군, 꿈속에서 도원에 노닐다 5. 몽유도원도, 탄생하다 6. 지상에서 무릉도원을 찾아내다 7.계유정난으로 사라지고 흩어지다 8.기억과 역사 속에 떠오르다 9.임진왜란 때 약탈당하다 10.몽유도원도, 아직도 유랑중인가



임진왜란때 약탈, 일본인 손에 전전



1929년 오사카와 교토 일대 고미술상에 진귀한 조선의 고서화 한 묶음을 가진 50대의사업가 소노다 사이지 사장이란 사람이 나타나 동양고미술의 권위자인 교토대의 중국사교수 나이토 고난 교수에게 감정을 요청했다. 이 그림은 일본 수묵화의 융성기였던 무로마치시대(1336~1573)에 큰 영향을 주었던 조선화의 종주 격인 안견의 몽유도원도였다. 그림과 짝을 이루는 23편의 필사본 찬문을 쓴 이들은 안평대군, 김종서, 박연, 정인지, 성삼문, 신숙주,박팽년등 조선조 세종시대의 쟁쟁한 조정 관리이자 학자들이었다. 나이토는 이 그림을 알아보고 감격하여 "조선 안견의 몽유도원도"란 논문까지 며칠 후 발표했지만 실은 이 그림은 오래전에 일본 정부가 가고시마의 사쓰마 가문의 소장품으로 검인까지 찍어 등록해 놓은 것이었다..(1장)



이 그림은 이후 우에노공원의 서화 전시회에 전시되어 일본인들의 찬탄과 주목을 받았지만 저자는 그림의 찬문을 쓴 사람들이 안평대군과 함께 정치적 비운을 맞은 그 이후의 조선사에 주목하고 안평대군과 그의 꿈을 그린 이 그림의 내용에 대해 여러 장을 할애한다.



그러나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의 도로 포석 하나를 보면서도 영화장면처럼 역사이야기를 상상으로 줄줄 뽑아낸 것과 달리 저자는 어디까지나 발견된 사실과 정확한 문헌 기록들을 통해서 이 그림의 소유주가 바뀌어 간 과정을 유추한다. 사쓰마의 시마즈 가문의 계보도까지 추적해서 틀림없이 귀중한 가보로 전해졌을 이 그림의 소유 이전을 추적하고 결국 덴리대가 소장하게 되기까지의 경위를 소상히 기록한 것은 가장 큰 강점이다.



위에 소개한 각부 제목만으로도 안평대군의 내면의 꿈과 이상향, 이를 화폭에 옮겼던 안견과 앞 다퉈 그림에 대한 예찬을 글로 남겼던 인물들의 역사의 한 장이 눈앞에 전개되는 듯하지 않은가.



그러나 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대공황의 여파로 일본의 경제가 흔들리던 시점인 1928년경 지방 토호들과 무사계급의 귀족들이 1887년 도쿄에 설립했던 주고(十五 )은행이 도산 위기에 몰리자 주주였던 시마즈 시게마로 남작은 도산위기에서 재산을 현금화 하기 위해 몽유도원도를 후지타 데이조란 사람에게 3천엔(약 2천만원)에 담보로 넘긴다. 그래서 그 후 파산을 겪게 되면서 500여점의 골동품과 서화가 경매에 넘어갔지만 몽유도원도는 그 중에 없었다. 후지타에게서 이를 매입한 사람이 소노다 사이지 사장이었다.



그후 도쿄의 유명 골동품상 류센도에 매물로 나왔던 몽유도원도는 1947년 초대 국립박물관장 김재원박사가 일본에 갔을 때 구입이 가능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당시로는 너무 거액인 수천 달러를 홋가 하는 바람에 포기했다고 한다. 이후 힌국전쟁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일본인 정객이 구입을 권유했지만 이때는 가격이 더 폭등해서 모 재벌을 시켜 구입하려 했는데도 그가 사지 않았다는 등 일화도 무성하다.



저자는 충남 서산에 세워진 안견기념관의 기념비에 조잡하게 새겨진 몽유도원도의 모양과 비석의 열악한 보존상태를 지적하면서 한국에서는 안평대군을 추모하고 몽유도원도를 기릴 수 있는 곳조차 한군데도 없음을 한탄하는 말로 책을 끝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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