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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한국인 모두 양반 후손인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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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4-09-01 00:00 조회1,28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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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성씨와 족보 이야기

박홍갑 지음|산처럼|408쪽|2만5000원


´덕수 이씨´인 충무공 이순신은 한양 건천동에서 태어났다. 외직에 나갔을 때를 제외하면 한양과 충청도 아산에서만 살았다. 개성 남쪽 마을인 경기도 덕수에 살았거나 다녀왔다는 기록은 없다. 그래도 이순신은 덕수 이씨다. 율곡 이이 역시 ´덕수 이씨´지만 태어난 곳은 어머니 신사임당의 친정인 강릉이었고, 한양과 경기도 파주에서 주로 살았다. 덕수는 조선 태조 때 해풍군에 편입됐다가 다시 풍덕으로 통합됐다. 고을 이름은 없어져도 덕수라는 본관은 변하지 않는다.



본관은 옛 조상이 살았던 본거지로 같은 본관을 사용하면 피를 나눈 혈족 집단의 일원으로 간주한다. 경상도 출신 나주 정씨, 전라도 출신 김해 김씨도 본관을 바꾸지는 않는다. 지금도 강하게 남아 있는 문벌 의식 때문이다. 그것은 ´허위의식´일 수 있지만 현재의 고된 삶을 버티게 하는 자존감의 근거도 된다.



본관은 스스로가 양반이라는 인식을 내세우는 수단이 된다. 중국에는 시조가 두부 만들던 사람도 있는 반면, 한국인은 거의 모두 유명 인물의 후손임을 자랑한다. 조선 후기 특정 가계를 통째로 어느 인물의 후손으로 둔갑시켜 족보를 만드는 일이 많았다. 다산 정약용은 이 같은 풍토를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갈아치우는 ´환부역조(換父易祖)´라고 한탄했다. 그래도 성(姓)까지 바꾸는 경우는 드물었다. 우리말에서 결백을 주장하거나 다짐을 할 때 ´차라리 성을 갈겠다´고 하는 것은 ´본관´은 몰라도 ´성´은 바꾸지 않았다는 뜻일 수도 있겠다.



성씨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때는 신라 말에서 고려 초로 추정된다. 적어도 7세기 이전에는 성이 없었다. 6세기 건립한 진흥왕순수비에는 수많은 수행 인원의 이름이 적혀 있지만 성을 사용한 예는 찾을 수 없다. 국사편찬위원회 연구편찬실장을 지낸 저자는 기존 연구 성과를 들어 신라 건국 당시부터 있었다는 박·석·김의 세 성씨 역시 후대에서 소급해 붙인 것으로 본다. 본관은 고려 초기인 10세기 중엽 이후 나타났다. 애초 본관은 지역별로 세금 부과 등 정책 실현을 위한 도구였다.



족보의 복잡한 형태 등을 설명하는 앞부분 1부의 설명이 지루한 독자는 2부부터 읽어도 좋다. 성씨와 족보를 통해 우리 역사와 사회 밑바닥에 흐르는 저류(底流)를 되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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