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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 피는 못 속인다? ´핏줄 지도´로 살펴보는 한국인의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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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4-09-01 00:00 조회1,543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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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는 한 성씨의 시조를 기점으로 해 그로부터 출생한 자손을 일정한 형식과 범위로 망라한 집단적 가계 기록이다. 우리가 족보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15세기부터지만 실제적인 기점은 17세기 후반이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족보는 18세기에 완성된 형태로 자리 잡았다.



초기 족보에는 외손 당대만이 아니라 한없이 이어지는 외후손을 족보에 차별 없이 올렸다. 내외손을 구분하지 않고 동등하게 가족의 지위를 인정했다. 그리고 양자를 들여 가계를 잇는다는 개념도 없어서 가계가 단절된 경우도 많았다.



시대에 따른 족보의 변화 고찰

생물학적 계보 넘어 사회 반영

"집단 기억의 매체, 재조명 절실"



특수한 족보도 많았다. 여러 성씨를 망라한 족보의 백과사전인 ´만성보´를 비롯해 ´선원록´ ´종친록´ 등 왕실 족보가 있었다. 관직에 진출한 사람의 계보를 밝힌 ´진신보´와 ´잠영보´, 문과 급제자에 관한 인명록이나 일반 문사록에 해당하는 ´문보´, 무관 출신 집안의 가계를 정리한 ´무보´도 있었다.



´우리 성씨와 족보 이야기´는 족보를 통해 한국인의 정체성을 보여 준다. 초기 족보의 형태, 시대상의 변화에 따라 족보들이 진화해 가는 모습, 족보를 둘러싼 다양한 사회 문화 현상, 족보의 허상과 실재들을 실었다. 족보가 단순한 생물학적 계보를 추적한 것이 아니라 당대 사회현상을 반영한 결과물임을 짚어 본다.



내시의 족보도 있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경상북도 청도 임당리에 가면 내시가 살았던 김씨고택이 있다. 중요민속문화재 제245호인 김씨고택은 일반적인 가옥 구조와 비교해 다소 특이한 점이 있다. 안채에서 살림하는 부인들의 동선을 제한하고 이를 감시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고택 실측 조사 중에 별묘에서 ´내시부통정김일준가세계´라는 내시 족보가 발견돼 주위의 관심을 끌었다. 김일준(1863~1945)은 조선 말기 통정대부 정3품을 지냈으며, 내시 가문 시조로부터 16대째를 이어 온 사람이다. 따라서 당대에까지 내시 생활을 해 왔으며, 17대 광주김씨 김문선(1881~1953)부터 다른 길을 걸었다.



´내시부통정김일준가세계´에는 시조부터 2대 이세윤과 3대 김희보를 거쳐 14대 유광원, 15대 김병익에 이르기까지 수록돼 있다. 9대 정세경은 분무원종공신이 되기도 했다. 분무공신이란 1728년(영조 4)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녹훈된 공신을 지칭한다.



내시 가계를 잇는다는 것은 양자를 들이는 방법 외에는 없다. 그래서 대를 이어 가는 자손 모두 성씨가 다른 것이 특징이다. 시조부터 15세까지 지낸 관직과 성명, 본관, 묘소의 위치나 좌향 등이 소상히 기록돼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는 내시의 족보인 ´양세계보´가 소장돼 있다. 이 역시 성씨를 달리하는 양자로 이어져 온 내시의 계보다. 이 족보는 1805년 이윤묵이 만들었다. 내시도 다른 가문과 마찬가지로 가계 계승 의식이 컸음을 보여 준다. 기른 정 역시 낳은 정 못지않아 족보를 만들게 됐다는 사실이 서문에 나온다.



성과 본관 문제를 놓고 볼 때 한국의 18세기는 격동기였다. 농촌이나 도시를 막론하고 17세기 말까지 성관을 가진 인구 비율은 50% 내외였지만, 100년 뒤 90%를 넘는 사람이 성관을 지닌 것으로 파악됐다. 문제는 새로운 성관을 획득한 사람이 다른 사람이 쓰던 기존의 성과 본관을 선택한 것이지 창성이나 창관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조상 갈아타기를 한 셈이다.



17세기만 해도 극소수 양반만이 족보를 가졌다. 18세기에 접어들어 신분 상승을 위한 하층민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조선 후기 사회경제적 변동과 맞물려 양반보다 많은 재산을 모으거나, 유교 예법과 독서 경험을 쌓아 양반에 버금가는 평민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법률을 비롯한 행정 관행을 숙지해 관을 상대로 소송까지 불사했다.



족보 장사도 생겨났다. 위험한 장사임에도 인쇄소를 차려 놓고 족보 장사를 서슴지 않았을 만큼 수요가 넘쳤다. 사적으로 활자를 소유하는 그 자체가 허락되지 않았던 시절인데도 영조 때 한양 한복판에 인쇄 시설을 갖추고 족보 장사를 하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우리 역사상 족보 간행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일제강점기였다. 1894년 갑오개혁 때 이미 양반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됐고 시간이 지나 나라가 망해 버렸어도 양반 의식만은 그대로 잔존했기 때문이다.



동양에서는 고대 중국에서부터 발달한 족보 문화가 이웃 국가로 파급돼 갔는데 일본에만 족보가 없다. 일본에는 ´가계도´가 있는데, 이것도 피를 나눈 혈통을 표시한 것이 아니라 가업을 물려받은 사람 중심으로 그려진 계보도다. 한국의 가문은 ´혈연 중심´이지만 일본의 가문은 ´업연(業緣) 중심´이기 때문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을 역임한 저자는 "혈연을 바탕으로 한 집단기억의 매체인 족보를 새롭게 조명해 문화적 기억으로 되살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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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타님의 댓글

두타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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