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보] ‘茶’에 빠진 英, 中의 ‘茶’를 빼앗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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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3-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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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목전쟁 / 세라 로즈 지음, 이재황 옮김 / 산처럼
19세기 중반 서세동점의 문명사적 격변 속에 영국이 중국을 상대로 벌인 아편전쟁(1840∼1842)은 ‘역사상 가장 부도덕한 전쟁’ 중 하나다. 영국이 중국에 아편을 밀수출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청나라는 1729년 첫 아편 금지령을 내리지만 아편 밀수는 계속됐고, 아편중독 문제는 심각해졌다. 1839년 보다 못한 광저우(廣州) 중국 관서 최고 책임자는 외국인 숙소에 있던 사람들을 잡아들이고 영국인 300명의 몸값으로 아편을 요구한다. 몰수한 아편은 주장(珠江)강에 떠내려 보냈다. 아편 무역으로 생기는 엄청난 이익을 지키기 위해 영국은 막강한 해군을 보낸다. 결과는 중국의 완패였다. 이를 계기로 영국은 홍콩섬을 차지하고 중국의 다섯 개 항구가 열렸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세계사이다.
미국 저널리스트 겸 작가 세라 로즈는 19세기 동서양 두 제국이 벌인 전쟁을 아편전쟁이 아닌 ‘초목전쟁’, 양귀비와 동백꽃의 전쟁으로 규정, 추적한다. 양귀비를 가공해 만든 아편은 당시 인도 당국의 비호 아래 영국 동인도 회사에서 독점 판매했다. 반면 차나무인 동백나무는 중국 독점이었다. 청은 이 ‘액체 보석’을 재배·수확·가공·조제해 생산·도매·수출하는 유일한 나라였다. 동인도 회사는 200년 가까이 중국에 아편을 팔고 그 돈으로 차를 샀다. 당시 영국은 중국 차에 매료돼 있었다. 비가 많고 우중충한 영국 날씨에 차만큼 어울리는 것이 없었으니 차 수요는 폭발적이었다. 영국 정부는 차에 세금을 부과했고, 이는 영국 세원의 10%를 차지했다. 다소 과장하자면 중국의 차가 영국 식민제국주의의 탄환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편전쟁은 영국이 아편과 차의 균형을 깰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중국의 항구가 열리면서 미지의 중국 생물 자원은 처음으로 서양에 노출됐다. 영국 정부는 중국에 식물학자를 보내 식물 자원을 수집했다. 당연히 영국인이 열광한 차도 그 대상이 됐다. 영국은 중국에서 차 묘목을 빼돌렸다. 영국 토양이 차 재배에 적합지 않았지만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에는 광대한 식민지가 있었다. 식민지 인도에서 차 재배에 적합한 지역을 찾았다. 차를 재배하도록 잔인한 방법을 동원한 주민 설득이 이뤄졌다. 그러니 19세기 차의 이동이 단순한 식물 이동 역사이기만 하겠는가. 오늘 마시는 향기로운 차 한 잔이 제국주의 생물 자원 수탈의 역사를 밟아 왔다는 사실, 맛을 향한 인간의 집단 욕망이 얼마나 무모하게 집요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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