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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평민의 양반 되기 ‘성씨·족보를 내 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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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4-09-15 00:00 조회1,74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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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 위조와 대대적 ‘신분세탁’

‘부계 친족’ 형성으로 최종 완성




왼쪽부터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 <우리 성씨와 족보 이야기>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

권내현 지음

역사비평사·1만2800원


우리 성씨와 족보 이야기

박홍갑 지음

산처럼·2만5000원

조선 500년은 벼슬에 오른 특권 양반층이 기득권을 나눠주지 않으려고 법과 윤리를 집요하게 동원했던 과정이다. 또한 역으로, 이들에게 수탈당하고 배제당했던 이들이 너도나도 ‘양반 모방’을 행하여 결국 다수가 양반이 되는 ‘양반화 과정’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족보와 성씨, 본관은 양반 되기의 핵심 열쇠에 속한다. 양반이 되고자 분투했던 우리네 조상들의 얘기를 다룬 책 두 권,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과 <우리 성씨와 족보 이야기>가 나왔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신분 세탁’인데 이는 요컨대 18세기 말~19세기에 이르러 ‘부계 친족’의 형성으로 최종 완성된다.


<우리 성씨와 족보…>는 양반의 표지로 작용했던 족보, 성씨, 본관의 변천 과정과 ‘시조·조상 만들기’의 양상을 두루 이야기하듯이 들려주는 책이다. 15~17세기 중반의 초기 족보는 친손·외손 구분 없이 등재했다. 15세기 후반 족보에 등재된 인물을 헤아리면 외려 외손이 90%가 넘는 경우도 많았다. 여말 선초의 부계와 모계를 구분하지 않던 양측적 친족사회 세태, 남자가 여자 집으로 장가가는 혼인 습속과 아들딸 균분상속 세태 등에 따른 결과였다.


흔히 떠올리는 남계 위주의 친족만을 담은 족보는 17세기 말에야 나타난다. 족보 만들기는 양반이나 거기 끼지 못한 이들에게나 조상을 더 화려하게 꾸미고 때로 남의 조상을 제 조상으로 만드는 과정이었다. 18~19세기 성행한 족보 위조는 본관 갈아타기, 한 세대를 중간에 끼워넣기, 조선 초 자손 끊긴 이의 후손 되기까지 다양했다. 본관은 조선 초 4500여개였으나 1985년 통계에선 3400여개로 줄었다. 별볼일없는 성을 버리고 유력한 본관으로 옮겨갔음을 뜻한다. 17세기 말 성과 본관을 가진 인구는 50% 안팎이었지만, 18세기 말이면 90%를 웃돈다. 재산이 많거나 유학을 익힌 평민들은 족보를 만든 뒤 그 족보를 근거로 평민에게만 부과되던 군역을 면해달라는 소송도 불사했다. 1764년엔 한양 복판에 인쇄시설을 갖추고 족보장사를 하다 적발되는 사건도 터졌다. 18세기 들어 하층민의 대대적인 ‘신분 세탁’이 시작된다.





17세기 전주 류씨 수곡파에서 간행한 족보. 산처럼 제공







<노비에서 양반으로…>는 그 무수했던 행렬의 한 예를 파고들었다. 17세기 말 노비였던 ‘수봉’ 일가의 호적 대장을 추적했다. 경상도 단성현·도산면 등지에 살았던 한 가계의 200년 호적 기록을 좇은 보기 드문 책이다.

수봉은 경제력을 활용해 평민으로 올라섰다. 1678년 호적에서 그는 지역 세도가 심정량의 노비 59명 중 1인이었고 가족도 모두 노비였으나, 40년 뒤 1717년 호적에서 평민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호적의 ‘직역’ 난에 적힌 그의 신분은 평민에 속하는 납속통정대부. 납속은 곡식을 국가에 냈다는 의미다. 숙종 때인 1678~1717년 당시 정부는 노비 면천 문서나 통정대부 등에 임명하는 공명첩을 팔아 기근 진휼 재정을 확보했다. 수봉은 재산을 내고 합법적으로 평민이 되었던 것이다.


수봉은 주인집 인근에 가족을 이루고 살면서 주인 땅을 경작하며 자기 땅도 소유했을 것으로 지은이는 본다. 노비 수봉은 2명의 노비도 소유했다. 그는 1678년엔 본관이 김해로 돼 있을 뿐 성이 없었으나, 1717년엔 성을 김으로 신고해 김수봉이 됐다.


이런 ‘성장’은 그만이 아니었다. 도산면 남성 호주(주호) 중 노비가 1678년 40%가 넘었으나 100년 뒤인 1780년엔 10% 아래로 급감했다. 1678년 호주 가운데 성·본관을 다 가진 이가 59%였으나 1717년엔 74%로 는다. 성 없이 본관만 있던 이들은 30%에서 11%로 줄었다. 본관만 있던 노비들이 성과 본관을 갖춘 평민으로 성장한 것이다.


김수봉 당대엔 이루지 못했으나, 1831~61년 그의 5세·6세손에 이르면 양반 꿈이 실현된다. 호적 직역 난에 양반을 뜻하는 ‘유학’으로 등재됐다. 노예에서 해방되고 2세기 가까이 흐른 뒤인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마침내 그 후손들은, 양반 전유물이던 유학 호칭을 누리게 된 것이다. 김수봉의 고손자 김종옥은 본관 갈아타기도 감행했다. 1825년 도산면에서 김해 김씨보다 위세가 높던 안동 김씨로 바꾼다. 도산면의 평민은 18세기 내내 비슷한 비중을 유지하다, 19세기 중엽 이후 감소하며 그에 맞춰 양반이 는다. 대대적인 양반화가 이뤄진 것이다. 신분 체제에 대한 저항이라기보다는 모두가 양반이 되는 편입의 길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양반 체제 해체를 가속시킨 것도 사실이었다.



허미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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