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 선정 《승정원 일기, 소통의 정치를 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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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 일기, 소통의 정치를 논하다》가 <2010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 역사 분야에 선정되었습니다.
**관련 링크 http://www.kpec.or.kr/index.asp
『조선왕조실록』보다 방대하고 자세한,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꽃 『승정원일기』
『승정원일기』와 『조선왕조실록』을 비교하면 각각의 장단점이 있다. 현존하는 기록물의 총 기간을 보면 『승정원일기』가 절반에 불과해 288년 동안의 기록이지만, 양으로 따지면 『승정원일기』는 『조선왕조실록』의 약 5배 정도가 된다.(『승정원일기』는 3,245책에 적혀진 2억 4천 250만 자로, 중국에서 가장 방대한 역사 기록물이라는 『명실록明實錄』(2,964책, 1천 600만 자)보다도 방대하다.)
『조선왕조실록』이 시정기時政記나 사초 등을 토대로 편집자들이 취사선택하여 가공한 2차 자료라면, 『승정원일기』는 당시의 상황을 현장에서 바로 기록한 1차 사료다. 따라서 『승정원일기』는 현장에서 직접 붓으로 쓴 초서체의 필사본인 데 비해, 『조선왕조실록』은 활자를 이용한 인쇄본이다. 특히 『승정원일기』는 생생한 1차 자료이기에 조선시대 사용하던 문서 형식을 보여주기도 하고, 조선 후기까지 사용하던 이두문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왕과 신하들이 현안을 두고 토론을 벌일 때의 기록은 비디오 화면같이 생생하고, 마치 국회 속기록을 읽는 듯하다. 만약에 1만 명이 연명하여 함께 상소를 올렸다면 『조선왕조실록』에는 그 사실만 간단하게 기록하거나 생략했을 수도 있으나, 『승정원일기』에는 상소 내용 전문과 함께 1만 명의 이름이 깨알같이 다 적혀 있다.
또한 『승정원일기』는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꺼내 참고할 수 있는 자료였다. 비사秘史였던 『조선왕조실록』은 임금조차도 열람이 허락되지 않았지만, 『승정원일기』는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볼 수 있었다. 국정 운영상 전례를 찾을 때는 으레 『승정원일기』를 참고했고, 실록 편찬을 위한 시정기 찬집이나 『비변사등록』 작성에도 가장 큰 참고자료가 됐고, 개인적 송사 문제에까지 참고가 됐다. 그러니 조선 후기 난무하는 변무辨誣(사리를 따져서 억울함을 밝힘) 사건들에는 으레 『승정원일기』를 증거로 내세운 경우가 많았고, 개인 문집을 낼 때에도 필요한 자료로 뽑아 쓸 정도로 널리 애용됐다.
왕의 비서실 승정원에서 작성한 조선의 속기록, 『승정원일기』
국보 303호이자 2001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승정원일기』. 이는 그 명칭에서 보듯이, 승정원이란 관청에서 작성한 일기다. 승정원이란 왕의 비서실 역할을 하는 기구였으며 그들이 업무로 처리한 내용들을 일지로 작성한 것이 바로 『승정원일기』였다. 조선시대에는 왕에게 왜곡되지 않는 일원적인 보고체계를 확립하기 위해 승정원을 통해 왕명 출납을 맡겨 모든 보고가 이루어지게 했으니, 왕에게 보고되는 모든 문서는 승정원을 통해 왕에게 보고되고, 왕의 결재가 끝난 문서는 승정원을 통해 담당자에게 전달됐다. 따라서 『승정원일기』는 이런 보고와 결재 사항을 자세히 기록했을 뿐더러 날씨에서부터 국왕이 새벽에 기침하여 하루 동안 진행한 갖가지 일들, 즉 임금의 거처와 거둥, 경연과 신료들의 접견, 각종 회의와 지방에서 올라온 상소 등 모든 내용을 격식에 맞춰 정리했다.
『승정원일기』는 조선 초기부터 작성되기 시작하여 1910년 일제에 병합되어 나라를 잃을 때까지 장장 500여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했으나,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 때 불타버려 조선 전기 부분에 해당하는 광해군 이전의 것은 남아 있지 않다. 인조대(1623)부터 경종대(1724)까지의 『승정원일기』도 화재로 소실됐으나, 영조 22년(1746)에 복구하여 이는 전해지고 있다. 현재 『승정원일기』는 288년 동안의 기록으로, 책수는 모두 3,245책으로, 2억 4천 250만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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